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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화재참사 1년에 새기는 '그렌펠을 위한 정의'

  • Editor. 이세영 기자
  • 입력 2018.12.22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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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뉴스 이세영 기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후약방문’. 대참사가 발생하면 시민단체, 언론에서 많이 나오는 지적들이다. 한데 이제는 이런 말이 나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조까지 나온다. 큰 사고가 난 이후에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안 하는 것보다 뒤늦게라도 하는 게 낫다는 시각에서다. 늦다하더라도 제대로 개선한다면 그 씁쓸한 자조는 지워질 것이련만. 

지난해 세밑 '이게 안전한 나라냐'라는 국민적 공분을 불렀던 제천 화재 참사 그날 이후, 우리 사회안전망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지난해 12월 21일 29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가 1주기를 맞았다. 당시 화마가 할퀸 건물이 불에 잘 타는 재질로 마감돼 있었고, 소방 인력이 초기 화재를 진압할 공간이 작아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바뀐 부분이 많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건덕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왼쪽)가 21일 열린 제천 화재 참사 희생자 1주기 추모식에서 슬픔을 못 이긴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선 참사 당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충북 제천 지역에는 여전히 불법 주정차가 만연하고 있다. 1년 전 화재가 났을 당시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불법 주정차 차량 때문에 대형 고가사다리차는 500m나 우회해서 들어가야 했다. 골목길마저 좁아 사다리를 제때 펴지 못한 바 있다.

지난해 1만7627건의 불법 주정차 차량을 적발했던 제천시는 올해 1만7300건을 단속했다. 화재 참사의 교훈을 잊은 듯 골목 곳곳에는 불법 주정차 차량이 넘쳐나는 상황이다.

제천 화재 참사 당시 여성들이 모여 있던 2층 사우나의 통유리를 제때 깨지 못해 인명 피해가 커졌다는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소방대 진입 창 설치 기준 등을 담은 ‘건축물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개정 규칙’ 개정이 추진되고 있어 늦어도 너무 늦은 대처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 건물의 경우 어떤 기준이 적용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비상구 폐쇄와 불법건축물 문제도 마찬가지다.

충북도소방본부 등 합동조사반이 올해 도내 4043개 건축물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화재안전특별조사에서 불법건축물 등 중대 위반사항 561건을 적발했다. 이 중 대다수가 불법 증·개축과 방화문 설치 불량 등 구조적 문제로 드러났다.

제천 화재 때도 불법 증축된 건물 구조와 소방 설비 미비가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곳곳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비상구 폐쇄와 피난통로 물건 적재 행위에 대한 단속에서는 1417곳 중 127곳이 불량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스포츠센터와 인접한 거리에 있는 의림지 역사박물관이 ‘부실 건물 논란’에 휩싸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역사박물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는데, 설계에서부터 시공, 하자 보수까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12월 제천시 노블 휘트니스스파 화재 참사 현장이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2일 하순태 제천시의회 의원은 제천시의회 제272회 본회의에서 “의림지 역사박물관은 ‘누수 박물관’, ‘땜질 박물관’, ‘하자 박물관’이라는 오명까지 쓰며 제천시의 이미지를 구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의림지 역사박물관으로 인해 제천시의 안전 불감증이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안전 불감증에 대한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줬고, 제천시가 안전 불감증에 대해 얼마나 둔한지도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물관 하역장 천장 등에서 빗물이 줄줄 새는 누수현상이 발생하고, 특히 각종 유물이 가장 먼저 지나야 하는 하역장 벽면에서 균열이 발생했다”면서 “지하 1층 바닥은 물이 고여 있어 이미 부식이 시작된 상태로, 건물 안팎에서 이뤄진 ‘땜질 공사’ 흔적은 새로 진 건물인지, 아니면 오래된 건물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21일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로 목숨을 잃은 29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1주기 추모식이 화재 현장에서 500m가량 떨어진 체육공원에서 열렸다.

추모비에는 '이별도 아픔도 없는 따사로운 햇살만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이 적혔다. 유가족 대표는 "저희 유가족이 느끼기에는 변화된 게 하나도 없어요. 아직도 왜 희생자가 이렇게 컸는지에 대한 원인이 나오지 않았다“며 ”누구도 아직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제천 화재 참사 1년이 지났지만 최근까지도 보상 협상이 결렬됐고,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놓고도 진통이 가시지 않고 있다. 국민의 안전권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진지한 담론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제천 화재 이후 석 달 동안 화재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개선책을 담았다는 법안을 경쟁적으로 32개나 발의됐지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단 2개에 그쳤다.

소방활동 방해에 대한 처벌 강화와 소빙차 진입을 막는 차량 견인에 대한 지자체의 협조를 명시한 법안뿐이었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공분 정서에 편승해 현실성 없는 법안을 마구잡이로 발의하는 것에 그쳤을 뿐 철저한 원인 진단에 따른 종합적인 재발방지 법안은 마련되지 못했다.

'그렌펠을 위한 정의' 시위 현장. [사진=EPA/연합뉴스]

제천 화재보다 6개월 앞서 런던에서 72명의 목숨을 휩쓸어간 그렌펠타워 화재 참사를 통해 영국이 지금까지도 불안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면서 고통을 치유하고 시민안전을 위협하는 구조적인 모순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논의를 지속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화재 초기 미숙한 대응을 한 보수당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면서 결집된 시민단체 ‘그렌펠을 위한 정의’의 노력으로 고통과 절망을 딛고 안전사회로 가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생존자의 265개 증언을 확보해 주택안전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지난 10월 영국 정부는 고층 빌딩과 병원, 요양원, 기숙사 등에 가연성 소재의 외벽 마감재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영국 언론들은 "이를 계기로 영국 건물 안전 문화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연성 외장재 사용 금지 외에도 재난 대처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선 등의 조치가 획기적으로 단행되고, 독립적으로 꾸려진 조사기구를 통해 현재까지도 그렌펠 참사 의혹을 규명하는 청문회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철저한 반성에서 온전한 개선이 나온다는 시각에서다.

제천 화재 참사 1년이 다 되도록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위태롭다. 노후화된 열수송관 파열로 거리로 쏟아진 뜨거운 물기둥은 시민의 목숨을 빼앗았고, 펜션 보일러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온 일산화탄소는 수능을 마치고 우정여행을 떠났던 고교생 3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동안 방치돼 있던 안전사각지대에서 이처럼 새로운 유형의 재난과 충격적인 사고가 속출하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철저한 원인규명도 미흡하고, 여전히 비슷한 대책과 정교하지 못한 법안발의로 땜질식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제천 화재 비극 이후에도 도돌이표 재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영국판 세월호’로 주목했던 그렌펠타워 화재 뒤 영국사회를 깨운 ‘그렌펠을 위한 정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적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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