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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훈의 이야기力] 다른 세계의 다른 나, 또 다른 이야기 ②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9.16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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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신산업융합대학의 한혜원 융합콘텐츠학과 부교수는 일찍이 그의 저서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에서 이처럼 플레이어 간 교류에 기반해 형성되는 이야기에 관해 “게임 디자이너의 제한 영역을 넘어서서 발생하는 스토리로, 게임의 온라인화가 전제된 상황에서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의 차원에서 생성될 수 있는 우발적 스토리”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러한 우발적 이야기들은 애초에 게임 제작자의 의도와 정해진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것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므로 무궁무진하고 예측 불허하며, 개방적이면서도 비선형적이다. 그래서 게임 제작자가 준비한 선형적 시나리오의 끝에 다다른 플레이어들조차 게임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 게임에 몰입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우발적 이야기야말로 이미 플롯이 정해진 영화나 소설과 달리 게임, 정확히 말하면 온라인 게임을 무한한 이야기의 바다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

아직 잘 감이 오지 않는 이들을 위해 다음 3개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3개 사례 모두 게임 시나리오와는 무관하게 플레이어들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를 다뤘다.

플레이어들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야말로 이미 플롯이 정해진 영화나 소설과 달리 게임, 정확히 말하면 온라인 게임을 무한한 이야기의 바다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 [사진=엔씨소프트 제공]
플레이어들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야말로 이미 플롯이 정해진 영화나 소설과 달리 게임, 정확히 말하면 온라인 게임을 무한한 이야기의 바다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 [사진=엔씨소프트 제공]

우선 국내 MMORPG(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역할 수행게임)의 전성기를 연 리니지의 예다.

2001년 리니지 게임을 즐기던 한 플레이어의 친척이 분만 도중 혈액이 부족해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이른 적이 있었다. 당시 산모의 혈액형이 RH(-) O형이어서 혈액을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환자의 친척이었던 리니지 플레이어가 어떤 생각에선지 평소 즐기던 리니지에 접속해 산모가 위독하므로 헌혈자를 찾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상상이 가는가? 현실에선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그런데 기껏 한다는 게 평소 즐기던 게임에 접속해 글이나 남겼단다. 실제로 가까운 이의 생명이 오가는 긴급한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허용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발만 동동 구를지언정 그 시간에 산모 곁을 지키든지, 병원을 수소문하며 어떻게든 혈액을 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해당 메시지를 본 게임 운영자가 이를 서버 공지로 올렸고, 당시 공지글을 본 10만여명의 플레이어가 게임을 중단하고 ‘헌혈자를 구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다른 서버로 속속 전달했다. 잠시 후 글을 올린 플레이어의 휴대폰에는 도움을 주겠다는 메시지가 쇄도했고, 때마침 산모와 같은 지역에 살던 같은 혈액형을 지닌 다른 플레이어가 병원을 찾은 덕분에 산모는 수혈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례는 리니지의 후속작 리니지2에서 일어난 ‘바츠 해방전쟁’이란 거창한 이름까지 붙은 사건이다.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리니지2에는 ‘바츠’라는 이름의 서버가 있었다. 보통 한 서버에는 여러 개의 길드(게임을 함께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임)가 있었는데, 당시 바츠 서버의 ‘드래곤나이츠 혈맹’(DK길드)이란 이름의 길드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다른 길드에 비해 유달리 강했던 DK길드는 어느 순간 바츠 서버를 장악하고 사냥터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내야 하는 세금의 세율도 기존 10%에서 15%로 인상했다. 보통 한 영지에서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면 해당 영지를 소유한 길드에 그 일부를 세금으로 내야 했는데, DK길드의 세율 인상은 당시 바츠 서버에서 게임을 즐기던 다른 사용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공분을 샀다.

결국 DK길드의 폭거에 맞서 바츠 서버의 플레이어들이 들고일어났고, 급기야 여기에 다른 서버의 플레이어들까지 동참하면서 연합전선이 만들어졌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플레이어만 연인원 20만명에 달했고, 게임 시간으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게임 속 하루가 현실 시간으로 4시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에서조차 무려 4년여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었다.

끝내 전쟁은 바츠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군이 DK길드로부터 게임 내 최대 거점인 아덴성을 탈환하던 날은 ‘바츠 해방의 날’로 선언됐으며, 이날을 기념하는 수천 개의 글이 게시판을 가득 메웠다. 당시 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관찰된 각종 전략과 정치·사회 현상은 현실의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해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할 정도였다.

마지막은 미국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2004년부터 서비스한 MMORPG 월드오브워크래프트(와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와우는 한때 전 세계 1000만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즐겼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린 게임인데, 2005년 와우 북미 서버에선 훗날 ‘오염된 피’라고 불리게 된 일련의 사건이 터졌다. 그 전개 양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게임 패치에서 새롭게 등장한 괴물 중 ‘학카르’라고 불리는 괴물이 있었다. 학카르는 일정 지역에 들어간 플레이어에게 바이러스를 감염시켜 병에 걸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정 지역 내에서만 퍼지는 바이러스였으므로 해당 지역을 벗어나면 자연스레 병도 나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와우에선 사냥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 야생 동물을 길들여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잦았고 바로 이것이 문제의 불씨로 작용했다. 사냥꾼 플레이어가 자신이 길들인 동물과 함께 학카르가 있는 지역을 방문했다가 그 지역을 벗어난 경우, 해당 동물이 낫지 않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에 많은 동물이 바이러스를 보유한 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이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나 NPC(플레이어 외의 캐릭터)를 빠르게 감염시켰다. 결국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와우 세계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때 플레이어들이 취한 행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다르게 행동했다. 전염병이 퍼지자 치료사 직업을 가진 많은 플레이어가 감염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자체적인 민병대를 구성해 감염자가 많은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리지 않게끔 안내하거나, 감염자가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해당 지역을 벗어나지 않도록 격리 조치하는 데 도움을 줬다. 반면, 일부러 사람들을 감염지역으로 유인하거나, 자신이 감염됐음을 알면서도 인구 밀집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또 아무 효과가 없는 물약을 치료제로 속여 파는 등 상황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블리자드 측에서 직접 나서며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해당 사건은 전염병 발생과 확산이라는 주제로 의학 저널에 실릴 만큼 유명해졌고,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전염병 연구에 참고하기 위해 블리자드 측에 해당 사건에 관한 자료를 요청할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3개의 사건 모두 게임 제작자가 의도한 것과는 무관한,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에서 상호작용하며 우발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비록 굵직한 사건 3개만을 예시로 들었으나, 이외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이 게임 속 플레이어들에 의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이처럼 플레이어들이 만드는 우발적 이야기들은 게임에 다양성과 입체성을 더하고, 활력을 불어넣으며, 바로 이러한 이야기의 매력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빼어난 그래픽과 화려한 연출효과, 개성 있는 커스터마이징 기능,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 등은 그런 몰입감을 더욱 강화해주는 보조 장치로서 기능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집약된 총체가 바로 현재의 MMORPG, 즉 대규모 사용자가 접속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임 장르다. 동시에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게임 장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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