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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울트라’ 새롭게 떠오른 ‘한국식 밈’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9.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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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뉴스 여지훈 기자] 최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인상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용어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를테면 ‘빅스텝’,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 그것인데, 기자 역시 언제부턴가 별 의문 없이 해당 용어들을 당연시하며 쓰기 시작했다.

그 의미인즉슨 다음과 같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릴 시 그 인상 폭이 한 번에 0.5%포인트면 빅스텝, 0.75%포인트면 자이언트 스텝, 1.0%포인트면 울트라 스텝이라고 칭한다. 자이언트와 울트라는 각각 ‘거대한’, ‘극단의’란 뜻을 지니고 있고, 이전 연준의 금리인상이 한 번에 0.25%포인트 수준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요즘의 인상 폭이 무척 큰 편인지라 일견 타당해 보이는 어휘 선택이다.

최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인상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용어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를테면 ‘빅스텝’,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 그것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최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인상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용어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를테면 ‘빅스텝’,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 그것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하지만 이런 용어의 사용에 의문을 표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자이언트 스텝이나 울트라 스텝과 같은 용어의 쓰임이 국내에서만 사용되는 ‘한국식 영어’라는 주장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의문이 제기됐고, 이에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SNU팩트체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YTN의 박희재 기자가 그 주장의 진위를 가리고자 팩트체크에 나섰다.

박 기자는 사실 검증을 위해 최근 5개년 치의 미국 연준 성명문과 회의록, 지난 10년간의 미국 유력 경제 일간지 기사를 검토했고, 미국 연준 담당 기자와 관계자, 국내 전문가들의 조언도 구했다.

우선 최근 5년간의 미국 연준 공식 브리핑과 회의록에선 자이언트 스텝이나 울트라 스텝과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지난 7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금리 인상 폭을 두고 “대단히 크다(Unusually Large)”고 언급한 적은 있지만, 직접 자이언트 또는 울트라라고 표현한 적은 없었다.

용어의 어감 차이를 확인코자 국내에서 활동하는 상경 계열 외국인 교수에게 자문한 결과, “실제로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감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과 관련해서는 “자이언트 스텝이 울트라 스텝보다 더 정도가 강해 보인다”고 답변받았다.

심지어 빅스텝 역시 국내에서처럼 0.5%포인트 금리인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 적은 없었다. 올해 2월 존 윌리엄스 뉴욕 연은 총재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큰 폭’이란 의미로 발언한 적은 있었으나, 그 경우에도 현재 국내에서 그렇듯 고유명사로 쓰이지는 않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 일간지로 월스트리트저널을 꼽을 수 있다. 그런 월스트리트저널의 지난 10년간 기사를 확인한 결과, 금리 인상과 관련해서 자이언트 스텝 또는 울트라 스텝이란 용어를 국내에서 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더하여 국내 한 국제학부 원어민 교수에게 서면 질의한 결과 “‘울트라’라는 표현은 원어민인 내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서방 매체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로이터 미국 연준 담당 기자와 미국 월가 금융업 관계자 역시 서면 질의에서 “자이언트 스텝과 울트라 스텝과 같은 표현을 접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럼 국내 언론에서는 해당 용어들이 언제부터 쓰인 걸까?

조사 결과, 자이언트 스텝과 울트라 스텝을 현재의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은 각각 지난 4월과 6월이었다. 수년간 0%대 금리를 이어오던 연준이 이제 막 공격적인 금리인상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두 시점 모두 연준이나 국내 정부 인사를 인용한 곳은 없으며, 다만 첫 보도 이후 일부 언론에서 증권사 연구원 발언을 인용해 해당 표현을 쓴 경우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언론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시장에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성동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국민이나 시청자들에게, 그 이슈에 대해 이해를 효율적으로 시켜주기 위해 때로는 조어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국민에게 혼란을 가중할 수 있고 심할 경우에는 공포감을 조성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자들이 용어 선택에 있어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그간 경제 기사를 써온 기자로서 솔직히 고백건대, 해당 용어들을 다른 언론사에서 사용하니 어느 순간부터 따라 쓴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 표현이 유치하다고 여겨 쓰지 않았으나, 모두가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홀로 쓰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도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여겨진 탓이다. 더구나 중앙은행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표현하기엔 딱 안성맞춤인 용어들이었다.

일찍이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리처드 도킨스가 그의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밈’이란 것이 있다. 이는 ‘유전적 방법이 아닌 모방을 통해 전해지는 문화의 요소’로 정의되는데, 달리 표현하면 ‘문화적 유전자’를 가리킨다. 그 어원 역시 모방의 뜻이 함축된 그리스어 ‘mimeme’과 유전자를 뜻하는 영어 ‘gene(진)’의 발음을 합쳐 만들어졌다. 옷의 패션, 건축 양식, 유행하는 노래, 선전 문구부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이나 영상까지, 모방을 통해 확산 전파되는 문화들이 모두 이에 속한다.

그러고 보면 매체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다를 게 없다. 일부 기자들이 주도적으로 특정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 그것이 다른 기자들에 의해 모방되고, 그러다 관련 분야에서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를 현시점에서 함부로 좋다 나쁘다 판가름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직관적으로 이해된다고 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과도한 정서를 촉발한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번 형성된 문화가 사라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가령 기자를 비롯해 이미 해당 용어에 익숙해진 이들이 지금 당장부터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란 용어를 쓰지 않기로 작정하는 게 아니라면, 해당 용어들이 사라지는 건 연준의 큰 폭의 금리인상이 멈추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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