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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훈의 이야기力] 당신이 들려준, 흘러갈 뻔한 이야기 (中)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10.07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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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통화 상대는 아래층 주민과 에어컨 실외기 소음으로 다퉈 분을 삭이지 못하던 한 젊은 여성이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다짜고짜 격앙된 어조로 사연을 줄줄이 늘어놓던 그는 대화 중간에 이런 내용을 제보하면 기사로 써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와 기자를 적잖이 당황케 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본인의 불평불만을 전혀 모르는 이에게 쏟아낸 것이 겸연쩍었는지 들어줘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참고로 기자는 통화 앱을 사용하는 내내 직업을 공개했다.

또 다른 여성은 해당 앱을 이용해 알게 된 한 남성과 1개월 가까이 연락하던 중, 상대가 돌연 연락이 끊겼다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서러움을 토로했다. 호소와 농담을 적절히 버무리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시종일관 아삭거리며 오이를 먹고 있었는데, 기자가 대화 막바지에 상큼한 먹방(먹는 방송)을 잘 들었다며 고마움을 표하자 까르르 웃음으로 답했다.

고기를 먹고 체해 누워 있는데 심심해서 통화 앱을 켰다는 여성도 있었고, 한국어를 연습 중인데 코로나 유행이 잠잠해지면 방한할 거라던 일본 여학생도 있었다. 한 번은 통화 연결 후 몇 분간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부산한 소리만 들려와 잠자코 있었더니, 한참 후에야 놀라며 왜 말을 꺼내지 않았냐고 묻던 여성도 있었다. 뭔가 바빠 보여 가만히 있었다고 답하자 그는 팥빙수를 먹고 치우는 중이라 통화가 연결된 지 몰랐다면서 미안해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모르는 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분명 진귀한 경험이다. [사진출처=언스플래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모르는 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분명 진귀한 경험이다. [사진출처=언스플래시]

굴삭기를 운전하며 토목 쪽에서 일한다던 남성과는 건설 경기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는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지금 시행 중인 공사 대부분은 이미 수년 전 예산이 잡히고 계획된 것이라며, 지금의 여파가 건설 현장에까지 나타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자 역시 수년 전 시공사에 몸담은 적이 있던지라 그와 말이 잘 통했고, 상대도 재미있었는지 먼저 통화 연장을 했는데, 중간에 걸려온 전화로 통화가 끊긴 탓에 기자는 그에게 유료 아이템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공휴일임에도 판매서비스 업종에서 종사하는 탓에 온종일 일하다가 심신이 지친 채로 퇴근하던 여성과 연결된 적도 있었다. 당시 그는 운전 중이었는데, 운전 중에 전화하면 위험할 것 같다고 우려를 표하자, 오히려 본인의 마음이 지친 게 더 위태롭다고 멋지게 받아쳐 진심으로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기자는 그에게 힘내라고 진심 어린 응원의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젊은 나이치고는 차분하고 성숙한 면모가 있다고 했더니 “제가 좀 조숙한가 보죠”라며 담담히 웃어넘기던 20대 청년도 있었다. 공기업 취업 준비 중이라던 그는 지금이야 완쾌됐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암에 걸리신 이후 일찍부터 가정을 책임져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역시나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기자 역시 몇 년 전 어머니가 암을 진단받고 지금은 완쾌됐다고 말했더니 그때부터 서로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강남에서 세무사로 일한 지 수 년째지만 여전히 진로를 고민 중이라던 서른 살의 한 남성은, 본래 글 쓰는 걸 좋아했음에도 온종일 숫자만 보는 현실에 지쳤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에게 기자의 벗 중 하나도 세무사로 일하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걸 옆에서 지켜본 이로서 십분 공감한다고 말하면서, 강남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언제든 힘들 때 연락하면 밥 한 번 사겠다고 격려해줬다.

한 여성은 몇 안 되는 자기소개에 ‘노래 불러주기’가 있어 노래를 요청했더니 긴장된다며 한동안 목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대뜸 통화를 종료했고, 반대로 30분간 통화를 이어가던 중 똑같이 ‘노래 불러주기’가 있어 한 곡을 부탁했더니 기꺼이 불러준 음대생도 있었다.

이미 300명 가까운 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줬다던 그는 기자에게 선뜻 카톡 아이디를 알려줬고, 기자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 데 더해 카톡 아이디까지 알려준 그 믿음이 고마웠던 나머지, 지난 한 달간 틈틈이 피아노 대여실을 방문하며 익힌 두 곡의 피아노곡을 연주해줬다. 때마침 그날이 한 달 대여 기간이 만료되는 바로 전날이었는데, 열심히 연습했던 피아노곡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자 역시 큰 뿌듯함을 느꼈다. 그 시간이 밤 9시가 한참이나 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화했던 이 중 가장 어렸던 이는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이라던 19살 학생이었다. 광고디자인을 하는 게 꿈이라던 그에게 이야기 도중 어쩌다 보니 ‘참 어른’이라는 과분한 소리까지 들었는데, 꼰대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우려에도 불구, 극구 부정해주던 그 고마운 소녀는 기자에게 소설을 참 좋아한다며 한 작가의 소설을 추천해줬다. 이에 기자 역시 오래전 집필했던 소설 두 권을 ‘꽤 지루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추천해줬다.

평소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주위로부터 들어왔다던 20대 패션업계 종사자도 있었다. 회사 행사에서 우연히 쓰게 된 축사가 주위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는 그의 말에, 기자가 들려줄 수 있겠느냐고 끈질기게 부탁하자 그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축사를 낭독해줬다. 청아하고 여린 목소리임에도 강단이 깃든 힘 있는 낭독과 축사의 내용에 진심으로 감탄하던 중, 중간에 전화가 와 통화가 끊겨 아쉬운 마음을 메시지로 대신 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 20대 사회복지사는 그동안 임종 직전의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맡다가 지금은 보육원 등에서 아동들을 돌보고 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기자도 일찍이 수년간 자폐 장애인을 돌보며 사회복지사들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던지라 그들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에 가중해 지나치게 많은 문서 작업으로 힘들어한다고 우려를 표하자, 그는 반가워하며 사회복지사로서 겪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어 전화상으로 응원받은 건 처음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다만 대화 막바지에 사회복지사로서의 어려움이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그 모습을 취재하고 싶다던 기자의 말에 부담을 느꼈는지, 다음날 기자의 무탈을 기원하는 것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과연 그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를 빌려 사람을 단순히 취재 대상으로만 여기려던 그 어떤 마음도 없었으며, 다만 좋은 이야기를 널리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한 말을 꺼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성급히 말을 내뱉었음을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오래도록 좋은 일을 함에 있어 너무 지치지 않으시길 바란다.

환경공학과 대학원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때마침 기자도 환경과 기후위기 관련 기사를 쓴 지 며칠 안 됐던지라 그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환경위기, 기후위기로 인해 지구 환경을 되돌리기 위한 임계치가 이미 지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현 상황이 더 악화하지 않도록, 또는 그 악화 속도를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그것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화 앱을 통해 마지막으로 대화한 이는 39세의 여성이었다. 그날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던 그와는 새벽 늦게까지 수 시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 전화번호를 공유한 뒤에는 그가 코로나 격리조치 중이던 일주일 동안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 부분이 많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만나 함께 식사도 했다. 2개월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그와는 벗으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종종 연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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