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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피플]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 글이 만만해지는 세상을 꿈꾸다

  • Editor. 천옥현 기자
  • 입력 2023.02.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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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백색(百人百色). 백 명의 사람이 제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개성 넘치는 사람, 독특한 일을 하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 유명한 사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 등등…. ‘UP피플’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다양하기에 도리어 평범해질 수밖에 없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요. 바쁜 일상에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 면면을 담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 잠깐 시간을 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함께 들어볼까요.<편집자 주>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언어의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런데 이 세계를 ‘피치 못하게’ 넓혀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느린 학습자란 보통 경계선 지능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장애등급은 나오지 않지만, 학습능력이나 사회성이 평균보다 뒤처진다. 전문가들은 인구의 약 14%를 느린 학습자로 추정한다.

특히 느린 학습자는 일반 교과과정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읽는 행위에 대한 부담감으로 자연스럽게 학습을 멀리하게 되고, 점점 더 글과 멀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이들을 위한 맞춤형 학습콘텐츠와 지원정책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비영리기관이 있다. 2015년 설립 이후 발달장애인과 경계선지능인 등 정보 습득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쉬운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온 피치마켓. 학교나 교사들과 협력해 특수학급 학생들의 교육과정에도 참여한다.

피치마켓은 경제학 용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저급한 상품이 넘쳐나는 ‘레몬마켓’과 반대로 정보의 균형으로 품질이 좋은 상품이 가득한 시장을 말한다. 이름처럼 정보격차가 해소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를 만났다.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 [사진=천옥현 기자]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 [사진=천옥현 기자]

― 피치마켓은 어떤 일을 하나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콘텐츠 제작과 교육이다. 이 중에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일도 있고, 기업이나 정부 기관과 협업해 진행하는 사업도 있다. 그간 느린 학습자를 위해 200여권의 읽기 쉬운 책을 출간했고, 매년 800여개 이상의 특수학급 기관에 학습자료를 제공한다.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근로계약서나 신한카드와 함께 만든 금융취약계층을 위한 도서 등 기관과 협업해 실생활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기도 한다. 저희가 가진 전문성은 ‘글을 쉽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의학이나 경제, 법률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는 관련 분야 전문가와 같이 기획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 피치마켓을 설립한 계기는.

“사실 처음부터 큰 목표나 비전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학부 시절 법학 공부를 했는데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사법시험은 못 보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한국말인데 이해가 안 되니 자괴감이 들었다. 정보의 격차를 너무 많이 느꼈다. 그러다가 발달장애인들이 읽을거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고, 글을 쉽게 써볼까 해서 시작을 했다. 처음엔 사업화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잔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져 보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번째 도서가 실패한 후 ‘마무리는 하자’는 집념으로 두 번째 도서를 만들면서 지금의 ‘피치마켓’으로 이어졌다.”

― 첫 번째 책은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알고 있다. 그 책을 선정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책을 선택할 때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다가 고른 책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책 속에서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마음에 들었다. 당시만 해도 발달장애인이 사회로부터 고립된 경우가 많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컸던 시기였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그 도움이 선순환된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대중을 향해서도 ‘당신이 발달장애인보다 더 대단하다고 느끼겠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책 자체로서도 발달장애인이나 느린 학습자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 그렇게 만든 책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쉽게도 발달장애인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읽기에 단어나 문장이 어려웠고, 스토리 구성도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시간이 연대기 순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는 부분이나 장소가 빠르게 바뀌는 부분들이 복잡했던 것 같다. 사실은 첫 책을 내기 전 복지관을 통해 발달장애인 몇 분을 소개받았고, 그분들이 책을 보고 피드백을 해주셨다. 그런데 막상 출간하고 보니 발달장애인 분 중에서 그만큼 의사표현이 정확하신 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복지관에서 신경써주신 일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은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생활에서 발달장애인을 많이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이런 책을 만든다고 한 것 자체가 굉장히 시건방졌던 건 같다.”

피치마켓에서 제작한 도서 [사진=천옥현 기자]
피치마켓에서 제작한 도서 [사진=천옥현 기자]

― 그래서 어떻게 했나.

“쉽게 쓰자고 만든 책인데 어려운 책만 하나더 만든 채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특수학급 선생님을 찾아가 수업에 참관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다행히 선생님이 허락해주셔서 학생 신분으로 2학기 동안 수업을 받았다. 다른 학생과 똑같이 숙제하고, 발표하고, 짝꿍과 손잡고 체험학습도 갔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이 매일 쓰기 숙제를 내주시고, 학생들이 쓴 내용을 전달해주셔서 그걸 연구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니 그들이 사용하는 문장구조나 단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책의 실패 원인도 그때 알게 됐다. 그래서 그걸 규칙으로 정리하고 적용해 두 번째 책을 냈다. 두 번째 책은 생각보다 좋은 호응을 얻었고, 그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 현재 피치마켓의 구성원은.

“20명 정도가 함께 일하고 있다. 콘텐츠팀과 교육팀, 운영팀으로 나뉜다. 콘텐츠팀엔 정보성 글, 시나리오, 소설 등 다양한 글을 쓸 줄 아는 에디터들이 있다. 교육팀은 특수교사였거나 초등교사였던 사람들이 합류해 꾸려지게 됐다. 운영팀은 서비스를 전반적으로 운영한다. 지금 조직을 개편 중이다. 앞으로는 직접 서비스를 하는 것보단 인식이 확산할 수 있도록 현장 전문가들을 모으고, 지식과 노하우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 직원들이 많다보니 운영비도 많이 들 것 같다. 비영리단체인데 수익원은 후원금인가.

“피치마켓은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회사는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으로 비치길 원하지 않는다. 느린 학습자들이 어떤 프레임으로 비치게 하는 게 조심스럽다. 또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기반이 돼야 하는 서비스다. 학습자들의 행동 변화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동안 정치나 사회적인 흐름과 별개로 일관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부처 관점이라기보단 정관에 정해진 수익사업들을 해서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한다.

구체적으로 콘텐츠 구독과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큰 축이다. 콘텐츠 구독의 경우 처음에는 책만 만들었지만, 도서로만 교육 활동을 하기에는 느린 학습자들의 집중력 등이 여의치 않아 디지털 콘텐츠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특수학급이나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구독 형태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CSR은 피치마켓의 활동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파트너 기관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진행한다.”

― 피치마켓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나는 학생이 있다. 처음 피치마켓에서 교육을 받았던 학생인데 초등학교 6학년이고 경계선 지능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처음에 ‘우리 아이는 글을 이해하진 못하고, 여기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며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 그 친구는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 독립문까지 매주 센터에 방문했다. 올 때마다 30분씩 술래잡기를 해야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던 학생이었다.

그 친구와 독서 활동을 함께한 지 3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 1인 1케이크를 사들고 오셨다. 아이가 시중에서 파는 도서를 공부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엉엉 우시면서 감사하다고 하시던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처음에 엄마도 포기했던 아이가 어엿하게 성장한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고, 그때부터 ‘느린 학습자’라는 용어를 쓰게 됐다. 조금 느리더라도 학습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발표를 듣고 있는 특수학급 교사들 [사진=피치마켓 제공]
발표를 듣고 있는 특수학급 교사들 [사진=피치마켓 제공]

― 함의영 대표가 일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설명해준다면.

“얼마나 지속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좌우명이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 빌면 이뤄진다’였다. 별이 떨어지는 찰나에 소원을 빌 정도면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몰입하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찰나에 떠오를 만큼 집중하는 걸 일로 하자는 주의고, 그게 지금은 피치마켓이다.

사실 직원들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구상하고, 하나씩 해나가는 과정이 여전히 즐겁다.”

― 피치마켓의 목표, 3년 후 정도로 가늠해본다면.

“목표에 대해 뚜렷한 상을 그리진 않는다. 다만 앞으로는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지금은 일정 직원 이상이 투입돼야만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사업구조라면 앞으로는 같은 인원으로 더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 외부에는 피치마켓보다 더 전문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분이 많으니 그들이 모이는 장을 만들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중심축에서 피치마켓이 정보와 노하우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3년 안에 가고자 하는 길이다.”

― 함 대표가 꿈꾸는 세상을 그려본다면.

“글이 만만해지는 세상을 꿈꾼다. 느린 학습자들이 글을 읽는데 두려움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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