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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 논객마당] 美 대선 뒤끝엔 뭐가 남을까

  • Editor. 업다운뉴스
  • 입력 2016.08.01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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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이맘 때 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현지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접해본 남아공은 생각보다 혼란스러운 나라였다. 우선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적으로 소멸됐지만,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그토록 없애고자 갈망했던 흑백갈등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원인은 빈부 격차였다. 요하네스버그 교외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언덕 위 볕바른 곳의 백인 고급 저택촌과 그 아래 벌판에 형성된 흑인 빈민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을 뿜어내는 듯했다. 흑인 마을들은 대개가 길게 늘어선 공동화장실과 구정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해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들은 흑백갈등의 실상을 구체화시켜주었다. 남반구의 겨울이었던데다 적도에서 먼 아프리카 끝자락이라 해도 케이프타운은 한낮의 햇살이 만만치않게 따가운 곳이었다. 백인들이 남아공 땅을 탐내고 정복한 이유가 풍성한 햇살에 있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그런 날씨 속이었다 해도 흑인들이 일터로 향할 때 너나 없이 물통을 차고 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곳 백인들은 흑인들을 불가촉(不可觸)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백인 저택으로 잡일을 하러 가는 흑인들이 물병을 허리춤에 차고 다닌 이유는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주인 집에서는 흑인 일꾼들에게 냉수 한 컵 내주는 일이 없다고 했다. 잡역부들과 물컵이나 물병을 함께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백인들 중엔 불안에 떠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만델라 은퇴 이후에도 흑인 정권이 연이어 등장한게 그 배경이었다. 불안감은 백인들의 빠른 국외 이탈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실제 백인들의 인구비는 훨씬 적다는 말 또한 현지에서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이미 그 구성비가 10% 미만으로 떨어져 있다는 주장들이 많았다.

흑인들의 절대적 빈곤은 생계형 범죄로 표출되는 일이 잦았다. 귀국길에 잠시 머물렀던 요하네스버그는 극단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도심 속 호텔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문에선 무장 경비원들이 눈을 번득였다. 햇살이 아까워 잠시 정문 밖으로 나서려 하니 경비원 하나가 막아서며 “당신이 저 거리로 나가면 틀림 없이 5분 이내에 강도를 만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로변 나무 그늘 밑의 흑인들은 검은 피부로 인해 그 모습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백인들의 불안감을 알만했다. 

미국 대선전을 보는 동안 와닿는 느낌 중 하나도 미국 백인들의 불안감이다. 외신 보도를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불안감 역시 유색인종에 대한 경계심과 백인 기득권 상실의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느껴진다. 미국에선 백인이, 남아공에서는 흑인이 터줏대감 격이지만 오랜 세월 기득권을 누려온 쪽은 모두 백인계였다. 남아공 백인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유럽으로, 미국으로 피신하려는 것과 달리 미국 백인들은 이민자의 유입을 막거나 내쫓음으로써 자기 영역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 열망에 부응하는 이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층이 백인 근로자에만 국한된 건 아닌 듯 싶다. 완고한 백인 가정의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더 높게 나온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백인 중산층, 나아가 백인 주류 계층조차 은연중 트럼프를 지지하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우선 미국판 양반으로 행세해온 보수적인 WASP(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에게 민주당의 정치 이념 자체가 달가울리 없다. 더구나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와 여성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그들의 시각에선 영원히 비주류로 머물러 있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에게는 지금도 미국의 주류는 와스프이면서 남성이어야 한다는 오랜 신념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러지 않아도 백인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주장들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난 8년, 흑인 대통령의 집권은 그같은 분위기를 더욱 구체화시켰다. 백인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미국 골프장들은 타이거 우즈의 등장까지 겹치면서 흑인들의 놀이터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마당에 이번엔 또 다른 정치적 소수자인 여성이 4년 또는 8년 권좌를 넘보려 하니 아무래도 그들의 심기가 편할 것 같지는 않다. 클린턴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민법 개정을 통한 이민정책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백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당장 내쫓아야 할 수백만명의 불법 이민자들을 구제해 ‘완전하고도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한다는게 공약의 주내용이다. 그러잖아도 ‘비호감’으로 인식돼 있는 후보가 미운 짓을 골라서 한 셈이다.

미국 사회는 흔히 멜팅 팟(Melting Pot)에 비유된다. 이 말은 미국 문화가 백인들만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한데 어울려 각자의 문화를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여낸 뒤 완전히 새로운 미국의 고유문화를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남아공의 문화가 백인 문화와 흑인 문화가 각자 고유성을 지킨 채 ‘샐러드 바울’ 형태를 띠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멜팅 팟 문화로의 지향성은 아무래도 이민자들, 그리고 소수자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는게 상식적이다. 그래서 클린턴이 이민자와 소수자들을 향해 ‘함께’(Together)를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내겐 멜팅 팟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반면 주류계층으로 자부해온 백인들로서는 자신들만의 고유 문화를 용광로에 집어넣는 일 자체를 달가워 할 리 없다. 트럼프는 백인들의 그같은 불만과 불안감을 파고드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왔다. 광고학에서 말하는 부정적 소구(訴求)는 트럼프 선거 유세의 주된 수법이다. 거리의 엉터리 약장수가 노인에게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당신은 수년 내에 죽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를 줄기차게 펼쳐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수법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트럼프와 클린턴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당대회로 인한 컨벤션 효과를 누리며 지지율에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다. 만약 이번 대선에서 미국인들이 흑인에 이은 또 다른 정치적 소수자인 여성을 대통령으로 선택한다면 미국 백인 주류의 몰락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과에 상관 없이 백인들의 몰락 추세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어떤 경우든 신경 쓰이는 대목은 이번 선거전을 계기로 한층 심화될 백인 주류 세력의 극단적 경계심과 배타성, 그리고 외부를 향한 적개심이다. 그 가능성을 한발 앞서 보여준 이가 트럼프다. 남아공 백인들의 모습이 미국의 그들과 겹쳐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해옥 업다운뉴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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