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Parnassia palustris L.
‘강원도의 힘’을 또다시 절감하는 가을입니다. 앞산 뒷산은 물론 전국 곳곳의 산과 계곡이 울긋불긋 물들건만 모든 이들이 강원도로만 설악산으로만 향하는 양, 굽이굽이 돌아가는 차도는 막히고 산길과 계곡에는 인파가 가득합니다. 여름 내내 그늘을 만들어 무더위를 피하게 해주었던 숲이 노랗고 붉게 물드니 별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설악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마다, 계곡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은 꽃보다 더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니, 강원도 길마다 행락 차량이 넘쳐나는 게 당연한 일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 전국의 야생화 애호가들까지 강원도로 불러 모으는 ‘가을꽃’ 하나가 별도로 있으니, ‘강원도의 위세’를 단단히 떨치는 가을날입니다. 멀리 제주도 한라산에서부터 전라·경상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 부산의 금정산, 그리고 가야산·황매산·용문산 등 전국의 웬만한 고산에 두루 피건만, 유독 강원도에 피는 물매화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한 해를 마감하겠느냐는 듯 줄지어 찾아옵니다.
옛날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월나라의 서시(西施)는 처녀 시절 빨래하러 물가에 가자 물고기들이 그 미모에 반해 헤엄치는 걸 잊고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沈魚) 부인’이란 칭호를 얻었고,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은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잊고 모두 땅으로 떨어져 ‘낙안(落雁) 미인’이라 불렸다고 하지요. 강원도 계곡에 핀 물매화가 바로 파란 가을 하늘을 계곡 물로 내려 앉히고 흰 구름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게 하는 ‘가을 야생화의 여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국 산지의 산록에서 자라며, 7~8월 백색 꽃이 핀다.’는 여러 도감의 설명처럼 2달 전인 8월 초 백리향이 만개했던 가야산 등지에서 이미 꽃 핀 것을 보았건만, 가을이 무르익는 9~10월 평창·정선 계곡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물가에 핀’ 물매화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갔다’는 광고 카피가 있듯, 강원도 정선 계곡에 핀 물매화를 보기 전에는 물매화의 접두어 ‘물’이 왜 붙었는지 몰랐다고 많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메밀꽃이 피어날 무렵/ 타박타박 나귀를 타고/ 장을 따라 사랑을 따라서/ 오늘도 떠나가네~” 물매화를 보러 강원도로, 그 가운데서도 메밀꽃 흐드러지게 피는 봉평~대화 칠십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가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립스틱 물매화’라 불리는 평창 계곡의 매혹적인 물매화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천안 성거산 등 다른 자생지에도 수술의 꽃밥이 선홍색인 물매화가 자라지만 개체 수가 풍성하기로는 평창 계곡이 손꼽힙니다.
‘물가에 피는 매화를 닮은 풀꽃’ 정도로 풀이하면 딱 맞을 물매화는 이름대로 흰색의 꽃이 고매한 정절을 상징하는 매화꽃을 똑 닮았습니다. 다섯 장의 단아한 꽃잎과 중앙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동그란 암술 하나, 연한 미색의 꽃밥이 달린 다섯 개의 수술, 그리고 왕관의 장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수십 가닥의 헛수술 등이 물매화 꽃의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많은 이들을 매혹하는 물매화는 수술의 꽃밥이 선홍색으로 빛나는, 이른바 ‘립스틱 물매화’입니다. 청명한 가을 파란 하늘을 향해 우윳빛 꽃잎을 활짝 받쳐 든 것만으로도 예쁘기 그지없는데, 수술 끝에 붉은색 루주로 화장까지 했으니 가히 환상적이라 말할 만합니다.
겨울의 끝자락을 밟고 선 봄 매화가 그윽한 향으로 온 천지를 뒤덮는다면, 가을로 접어드는 여름의 끝자락에선 물매화가 빨간 립스틱을 앞세운 채 온 세상을 유혹합니다. 강원도의 계곡은 깊고, 물은 맑고, 그 물에 비친 하늘은 짙푸르고, 그 물가에는 희고 단아한 물매화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