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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 얼음을 깨고 피어난 봄의 전령사, 노루귀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7.02.2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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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

자연은 부지런합니다. 풀과 나무들은 부지런합니다. 여전히 외투의 깃을 올리고, 저 멀리 흰 눈이 쌓인 산을 바라보며 언제 봄이 오나, 언제나 봄이 오나 되뇌는 사이, 이미 봄꽃은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은 저절로 따라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봄꽃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부지런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왔어요.” 외치는 진홍색 노루귀. 2017년 2월 15일 전북 부안의 한 자생지에서 만났다.-

이미 1월 초순부터 제주도 들녘 곳곳에는 수선화가 피었고, ‘곶자왈’에선 백서향이 상아색 꽃을 활짝 터뜨리며 짙은 향을 온 숲에 뿜어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뭍에서도 강원도와 울산, 변산 등지에서 복수초가 황금색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화신(花信)이 전해진 지 보름여가 지났습니다. 양지바른 길섶에서 광대나물과 큰개불알풀의 꽃을 찾아보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 2월 15일 낙엽 더미를 헤치고, 돌무더기를 비집고, 나무 밑동 사이로 불쑥 올라온 노루귀의 앙증맞은 꽃송이들. 마치 루비나 사파이어 등 보석이 메마른 산비탈에 점점이 박힌 듯 황홀하고 매혹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봄보다 먼저 피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지척에 다가와 있음을 알리는 봄꽃의 하나인 노루귀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눈과 얼음을 깨고 핀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 또는 설할초(雪割草)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엄동설한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월 중순 눈이 덮인 변산반도의 한 산비탈에 몇몇 개체가 핀 사진이 야생화 동호인 사이트에 올라와 보는 이들이 안쓰러워했던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국명(國名)인 노루귀는 꽃이 핀 뒤 뒤늦게 고깔모자처럼 둘둘 말린 채 나오는 잎 모양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었는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장기의 하나인 간(肝)을 닮았다고 여겨졌나 봅니다. 해서 학명 중 속명은 간을 뜻하는 헤파티카(Hepatica), 영어 이름은 비슷한 의미의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로 불리고 있습니다.

노루귀란 이름을 낳은 이파리가 꽃이 핀 뒤 줄기 아래서 둘둘 말려서 나오는 모습.

전초(全草)라고 해야 키 10cm, 잎 5cm, 꽃 1.5cm 정도에 불과해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작은 풀꽃이라고 말하는 게 합당하지만, 다양한 꽃 색과 깜찍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는 ‘이른 봄 야생화의 대표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환상적이고 매혹적입니다. 먼저 꽃 색은 흰색에서부터 홍색과 청보라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이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봄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노루귀의 솜털들. 홍색과 청색의 꽃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홍색도 연분홍에서부터 진홍색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고, 청보라색 역시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색에서부터 코발트블루까지 다양합니다. 단순한 하얀색도 있지만, 미색에 가까운 흰색도 있습니다. 꽃 색 못지않게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건 꽃줄기와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 등에 난 무수한 잔털입니다. 볕 좋은 봄날 강렬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노루귀의 하얀 솜털을 한 번이라도 바라본 이라면 ‘노루귀’의 황홀한 매력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청색, 아니면 청보라색, 또는 코발트블루라고 해야 할까. 어느 화가의 물감이 이보다도 매력적일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노루귀의 청색 꽃들.

야생화 노루귀의 또 다른 큰 장점의 하나는 그 어떤 꽃보다도 개체 수가 풍부하고, 또 개화 기간이 길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자생지 또한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강원·경기 접경지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어 누구든 관심을 가지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르면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에도 꽃이 필 만큼 개화 시기도 깁니다. 한두 송이가 피기도 하지만, 많게는 수십 송이가 한데 뭉쳐서 나기도 하고, 산비탈 여기저기에 붉은색 루비나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힌 듯 많은 개체의 노루귀가 보석처럼 피어 있기도 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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