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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되돌릴 수 없는 봄 ‘숲의 여왕’, 얼레지!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7.04.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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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Erythronium japonicum (Balrer) Decne.

4월의 시작과 함께 ‘되돌릴 수 없는’ 봄이 우리 곁에 찾아왔습니다. 더는 겨울옷이 필요 없는 화창한 봄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지요. 화사한 날씨만큼이나 숲은 찬란합니다. 귀는 예서제서 삐죽빼죽 올라오는 새싹들로 요란하고, 눈은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꽃들로 현란합니다. 너도바람꽃과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들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노루귀, 복수초, 현호색, 제비꽃, 개불알풀, 광대나물 등등. 이른 봄 피는 풀꽃들이 한꺼번에 요란스럽게 피어나는 바람에 ‘꽃 멀미’를 할 지경입니다.

 
지난 3월 중순 경북 포항 구룡포 인근 산비탈에서 만난 얼레지. 중부·내륙 지방에 비해 보름 정도 빨리 개화했지만, 꽃잎을 활짝 열어 적힌 게 ‘바람난 여인’이란 꽃말을 실감케 한다

그렇게 피어나는 풀꽃 들꽃에겐 저마다의 매력이 있으므로 우열을 가린다는 건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이건만,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주목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4월 ‘숲의 여왕’이라 일컫는 얼레지입니다. 어떤 이는 S라인의 팔등신 미인 같다고 하고, 어떤 이는 셔틀콕의 멋진 모습이 연상된다고 하는데, 6장의 연보랏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힌 모습이 제 눈엔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전성기 시절 우리에게 선사했던 환상적인 스핀 플레이와 똑 닮아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천상의 화원’이라고 말하는 듯 온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얼레지 군락.

처음 얼레지란 이름을 들었을 때 ‘엘레지(비가·悲歌)의 여왕’으로 불리는 원로가수를  떠올렸는데, 그 뜻과는 상관없고 초록색 잎에 갈색 얼룩이 있다고 해서 붙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또 ‘가재무릇’이라고도 불리고, 삶아서 말린 잎으로 묵나물을 해 먹으면 미역 맛이 난다고 해서 미역취라고도 불립니다. 나물로 먹을 정도라는 건 그만큼 개체 수가 많았다는 뜻인데, 지금도 4월 중순 경기·강원도의 높고 깊은 산에 가면 산비탈 전체가 얼레지 꽃밭으로 물드는 장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할 듯 도도하게 피어있는 흰얼레지. 꽃 색만 다르지만, 별도의 학명을 가진 별개의 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얼레지가 그렇게 잘 번지도록 돕는 매개체는 바로 개미라고 합니다. 얼레지의 씨에서 개미의 유충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이 때문에 개미들이 얼레지 씨를 열심히 자신들의 개미집으로 옮겨다 놓고, 그 덕분에 얼레지 씨는 안전한 땅속에서 싹을 틔운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씨가 바로 이듬해 결실을 거두는 건 아니고, 싹이 트고 꽃이 피기까지 무려 7~8년이 걸린다니 인간사든 자연계든 무엇이든 이루려면 긴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 가 봅니다.

 
느닷없이 봄눈이라도 내리면 기온이 20도 이상은 올라야 꽃잎이 벌어지는 특성상, 꼭 입을 다문 채 추위에 떨고 있는 얼레지.

‘숲의 여왕’ 얼레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만나려는 이 또한 제왕이 된 듯 게으름을 한껏 피우며 다가가야 합니다. 기온에 따라 꽃잎을 닫았다가 다시 여는, 이른바 수면(睡眠)운동을 하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온도가 25도 이상 올라가야 6장의 꽃잎이 완전히 뒤로 젖혀지는데, 그러려면 4월 초의 기온을 고려하면 적어도 정오 무렵은 되어야 하지요. 이런 생태를 모르고 이른 아침부터 얼레지 꽃을 찾아갈 경우 “얼레지가 많기는 한데 하나같이 꽃잎을 오므렸네. 아직 개화 시기가 안 됐나. 다음에 다시 와야지.” 하고 돌아서기 십상입니다.

 
깊은 산 계곡 근처 명당에 자리 잡은 얼레지, 그리고 꿩의바람꽃과 밀어를 나누는 듯한 얼레지.

만개한 얼레지는 6장의 꽃잎이 서로 꽁지에서 맞닿을 정도로 활짝 젖혀지고, 중앙에는 1개의 암술과 6개의 수술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꽃잎에는 W자 형태의 무늬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는데, 이는 수분을 도울 벌·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장치라고 합니다. 어쨌든 꽃은 식물의 생식기인 셈인데, 그것을 대낮에 드러내는 얼레지의 꽃말이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인 것은 참으로 그럴싸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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