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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은희 별세, 남-북-미 삼국지로 이어진 최은희-신상옥 ‘영욕의 콜라보’

  • Editor. 조승연 기자
  • 입력 2018.04.1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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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뉴스 조승연 기자] “기쁨과 슬픔이 버무려진 참 행복한 삶이었다."

16일 투병하다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배우 故 최은희는 생전에 이렇게 반세기 넘는 영화인생을 압축했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두 번의 납북과 두 번의 탈출로 대변되는 사랑과 모험의 서사시. ‘한국의 잉그리드 버그만’으로 불리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배우이자 영화감독, 영화예술학교 교장, 극단 대표였다.

일제강점기에 연기인생은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영화배우로 꽃을 피우게 된다. 전쟁이 끝나갈 때 자신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었던 젊은 감독 신상옥을 운명처럼 만나면서 최은희의 영화인생은 꽃길로 달려간다. 이혼남 김학성과 사실혼 관계에서 5년 만에 벗어나 자신이 “야생마”라고 이름 붙인 신상옥과 1954년 결혼했다. 이후 신상옥-최은희 페어는 한국영화사를 바꿔놓은 히트 퍼레이드를 이어나간다.

최은희는 남편 신상옥의 영화철학을 담아내는 얼굴이었다. 2006년 4월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나고 1년여 뒤 나온 ‘난 영화였다-영화감독 신상옥 감독이 남긴 마지막 글들’에서 신상옥은 자신의 영화관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장르와 달리 영화는 흥행이 되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래서 어렵다. 관객의 눈높이를 고려하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 ‘관객의 눈높이’라는 것이 우리가 예측하는 것보다 많이 낮다. 그러면서도 까다롭고 날카롭다. 금방 싫증내고 변덕도 심하다. 그런 관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고, 꿈을 주고, 문제의식도 제기해야 하는 것이 영화의 소임이다. 대중과 너무 밀착해서도 안 되고, 너무 앞서가도 곤란하다.”

예술만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흥행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던 신상옥은 대중적인 감성과 예술적인 혼의 접점을 찾으며 1950~1960년대 신필름이라는 거대한 영화제국을 이끌어나갔다. 그 얼굴이 최은희였고 당시 한국 영화계는 충무로와 신필름으로 이분될 정도였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호흡은 작곡가 길옥윤-가수 패티김 커플 협업 등을 낳게 한 원조 '콜라보'로 볼 수 있다.

30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80여편을 직접 연출한 신상옥의 영화 세계에서 최은희는 100여편의 지분을 차지한다. 신상옥이 ‘난, 영화였다’에서 꼽은 대표작에서 최은희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사랑을 표현했고, ‘열녀문’에서는 여성이란 존재가 세상에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주며 전통과 페미니즘의 싸움을 끌어냈다. ‘빨간 마후라’는 파일럿과 공군 이미지를 뚜렷히 각인시킨 한국판 블록버스터로 꼽힌다.

1961년 최은희가 동시대의 라이벌 김지미와 대결에서 경이적인 흥행으로 판정승을 거둔 것은 국내 영화사를 장식한 유명한 사건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빚만 지고 살던 신상옥이 ‘어느 여대생의 고백’을 찍어 대성공을 거둔 지 3년. 김지미 주연,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에 ‘성춘향’으로 맞불을 놓았고 최은희는 당시 250만 서울 인구의 6분의 1을 극장으로 끌어모으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김지미와 인연은 1978년 최은희가 강제 납북 이후 5년 만에 신상옥과 북에서 숙명처럼 다시 만나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어렵게 얻은 해외 출장 때 새로운 국면으로 다시 이어졌다. 1985년 런던영화제 참석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남궁원-김지미 부부를 만났을 때 “자유분방한 예술 활동을 최대한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북조선 공화국밖에 없다”고 하자 후일 김지미는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일화는 신상옥-최은희 부부에 대한 북의 감시와 통제를 누그러뜨리게 하는 변곡점이 됐고 이듬해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김지미에게는 냉혹한 배신같았지만 이는 북한 탈출을 위해 영화 시나리오만큼 치밀한 각본이었던 셈이다.

1976년 이혼한 뒤 북에서 재회해 부다페스트 성당에서 결혼 반지를 나눠 낀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미국에서 10년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마지막 영화인생을 불태웠다. 1990년 신상옥이 제작한 ‘마유미’에 최은희가 출연하면서 남과 북에 이어 미국생활에서도 콜라보를 이어갔다다.

헤어진 지 2년이 됐지만 전처의 실종지인 홍콩까지 건너가 찾아 헤맸던 신상옥이 최은희가 죽을 줄로만 알았던 북한 투옥 초기에 ‘칭기스칸’을 세계적인 영화로 제작해보겠다는 구상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 원대한 꿈은 미국 망명 중 언론 인터뷰에서 일단이 드러났는데 칭키스칸의 어머니는 어렵게 두 번째로 반려자의 인연을 이어간 최은희로 정해져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고 다시 납북되는 등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배우 최은희. 남편의 성을 따서 세례명도 신데레사인 최은희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은 영화이고 신상옥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빈소에서 최은희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사랑했소, 앞으로도 사랑하겠소,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사랑하겠소.”

그리고 12년 하고 꼭 닷새 되는 날, 최은희는 영원한 사랑 신상옥의 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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