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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훈의 이야기力] 흑조(黑鳥)의 검은 날갯짓을 경계하라 (上)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3.0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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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 시력, 청력, 근력, 정신력…. 사람이 지닌 힘의 종류는 많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럼 여러분의 '이야기력'은 어떤가요? 이야기력은 '내가 지닌 이야기의 힘'을 뜻합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쌓아왔고, 어떤 이야기를 꿈꾸며,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여지훈의 이야기力]은 “좋은 이야기가 좋은 세계를 만든다”는 믿음 아래, 차근하고도 꾸준히 좋은 이야기를 쌓고 나누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편집자 주>

블랙스완(Black Swan). 해석하면 ‘검은 백조’란 뜻이다.

월가의 투자전문가였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동명의 저서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루면서 유명해진 단어다. 이후 경제·금융계에서 ‘발생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일단 발생하고 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력을 가져오는 사건’을 지칭할 때 자주 입에 올리는 용어가 됐다. 누구나 ‘백조는 희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예기치 않게 흑조(黑鳥)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이 무척 클 것이란 맥락에서 유래했다.

검은 백조가 성큼 다가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진=픽사베이]
검은 백조가 성큼 다가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진=픽사베이]

검은 백조가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러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경제제재는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그럼에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군사 격돌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최신 발표에 따르면, 지난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동부 도시 자포리자에 위치한 원자력발전소가 러시아군에 의해 장악됐다. 공격 도중 원전의 시설훈련센터가 심각한 훼손을 당했으나, 다행히 원자로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으며 방사능 수치도 정상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현재 자포리자 원전이 우크라이나인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덧붙이며, 원전을 관리하는 직원이 맡은 업무를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러시아의 공세가 수위를 높여갈수록 그에 비례해 대(對)러시아 경제제재도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국제 금융거래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의 러시아 퇴출, 러시아 은행·고위인사·신흥재벌의 자산동결 및 금융거래 제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러시아 최혜국 대우 박탈 검토, IMF 특별인출권 중단 검토 등이 서방국가에 의해 진행 중이며, 러시아행 수출품에 대한 제한 조치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직면한 것은 이들 국가에 의한 제재만이 아니다. 세계적 기업들 또한 반전(反戰)을 표명하며 러시아가 충분히 압박을 느낄만한 조처를 속속 취하고 있다.

전 세계 펀드의 벤치마크가 되는 국제지수를 발표해온 모건스탠리인터내셔널(MSCI)은 오는 9일 장 마감 이후부터 러시아를 신흥국 지수에서 배제하고 독립국가로 재분류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로써 기존 MSCI 러시아 지수 내 모든 주식에는 사실상 0에 수렴하는 가격이 적용될 예정이다. 해당 발표가 나온 2일 이미 그 이전부터 급락세를 보인 아이셰어즈 MSCI 러시아 ETF(ERUS)는 지난 3일 종가 기준 8.06달러를 기록하며 불과 2주 만에 75% 가까이 폭락했다. MSCI와 더불어 국제지수를 발표해온 또 다른 지수 제공업체 파이낸셜타임스 스톡익스체인지(FTSE)도 7일부터 신흥시장 지수에서 러시아 증시를 배제한다고 발표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의 러시아 국가신용등급 강등도 잇따랐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다드앤푸어스(S&P), 무디스, 피치는 최근 러시아 신용등급을 각각 CCC-, B3, B로 대폭 낮췄다. 표기의 차이일 뿐, 셋 모두 투자 부적격(투기등급)에 해당한다. 이는 서방국가 주도의 광범위한 경제제재로 러시아의 국가부도 위험이 극도로 커졌음을 반영한 것이다.

다른 다국적 기업들의 탈러시아 움직임도 빨라졌다. 애플은 지난 1일 러시아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디즈니는 그보다 앞선 지난달 28일 러시아 내 영화개봉 중단을 발표했다. 넷플릭스도 러시아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을 중단하고 러시아의 국영TV 송출 요구를 거절했다. 나이키와 이케아가 러시아 내 매장 폐쇄 선언을 한 데 이어 에르메스, 샤넬 등 명품 업체가 그 뒤를 따랐다. 이외에도 마스터카드, 비자카드, 마이크로소프트, 프라다, 푸마, 포드, 보잉, 제너럴모터스 등 각 분야 굴지의 기업들도 러시아에서의 사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 전 세계가 제재 수위를 높여가는 가운데, 국제적 움직임이 아직 시작 단계임을 감안한다면 현재 시점에서 그 여파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세계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러시아의 2020년 국내총생산(GDP)은 1조4835억달러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5%에 불과했다. 1.93%를 차지한 우리나라보다도 적은 수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이자 니켈과 알루미늄 등 주요 원자재 수출국이기도 하다. 또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 대량의 천연가스도 수출하고 있다. 전 세계 물가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에너지·원자재 수출국이니만큼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향후 어떤 반작용으로 돌아올지 그 파급력을 분석하기란 녹록지 않다.

다만 금융시장은 이미 그 위험성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4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2월 비농업 부문 일자리는 67만8000건 증가하며 시장 예상치인 40만7000건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실업률 역시 이전 4.0%에서 3.8%로 감소했다. 그러나 평상시라면 증시를 한껏 끌어올렸을 이 같은 고용 호조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미국증시 3대 지수는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달러 수요가 급증하며 달러인덱스는 2020년 6월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원·달러 환율 역시 7일 현재 달러 당 1225원을 돌파하며 1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투자자들의 심리가 위축되고 위험자산회피 현상이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이와 같은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 거라면 답할 수 없다. 각자의 능력과 사정,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사태를 대하는 자세에 관해서라면 조금 논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우크라이나 사태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영역에서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뜻밖의 사건이 터질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이목이 경제영역에만 쏠려 있으나, 이는 사태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격돌이 금세기 최대 난민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유엔난민기구의 경고, 좀체 잠잠해지지 않는 유럽의 코로나 확산세, 러시아군의 원전 장악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안보 위기, 러시아 내부에서조차 터져 나오는 반전 여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의용군, 급격히 수위를 높여가는 국가 간 경고성 발언 등, 이 모든 것을 서로 분리된 개별 사건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각 영역에서 발생한 극단적인 사건이 다른 영역으로 파급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상쇄되고 무엇이 심화될지는 알 수 없다. 각 주체의 합리적, 또는 비합리적 대응이 복합적으로 어떻게 맞물려 작용할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세상일이란 사칙연산으로 계산된 값처럼 딱딱 들어맞는 답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랜 일상에 익숙해진 이가, 미래에 닥칠 위험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대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의미 있는 정보와 소음을 선별해내기도 어렵다.

언제 어디서라도 검은 백조는 출몰할 수 있다. 세계 한편에서 실시간으로 수백의 사망자와 수만의 난민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하루의 가장 큰 고민이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인 사람이 있는 만큼, 아직 많은 이들에게 와닿기엔 괴리감이 클 수 있다. 그러나 흑조의 검은 날갯짓은 이미 시작됐을지 모르며, 지난 몇 개월간 일어난 사건은 전체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귓가에 날갯짓 소리가 들려올 때면, 대처하기엔 이미 늦은 뒤일 것이다.

경제산업팀장

 

■ 글쓴이는? – 근래 포털에 쏟아지는 우크라이나발 소식을 접하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 그러다 문득, 손짓 몇 번으로 휙휙 넘어가는 소식 건너편에 수많은 사람의 고통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냉정한 말일 수 있으나, 저들이 겪는 고통을 계기로 지금 내 자리를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됐다.

■ 취재 후기 – 평범한 개인이 손댈 수 없는 거대 시나리오에 희생되는 수백만의 사람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구구절절한 이야기라도,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독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소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이기(利己)를 위해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을 대비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씁쓸한 무력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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