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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투어] ⑨영덕 블루로드, 산과 바다를 양 어깨에 끼고 걷다

  • Editor. 김준철 기자
  • 입력 2023.03.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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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마다 걷기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요즘 걷기 여행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충 둘러보고 돌아서는 관광은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모든 감각을 통해 직접 수집된 오감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관광으로 여행자를 인도합니다. 길 위에서 게으르게 움직이며 풍경과 세상사를 느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재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수요도 점차 늘어나는 중입니다. 천천히 구석구석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여행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편집자 주>

[업다운뉴스 김준철 기자] ‘해파랑길’은 우리나라 동서남북을 잇는 코리아 둘레길의 동해안 구간으로, 부산광역시 오륙도 해맞이 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50km의 장거리 걷기 여행길이다. 해파랑이라는 명칭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색인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한 합성어로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해 4월 ‘2021 걷기 여행 실태조사’를 발표했는데 해파랑길이 2021년 걷기 여행자가 선택한 국내 걷기 여행길 중 2위로 꼽혔다. 만족도 면에선 97.3%의 이용자가 여행에 만족했다고 응답했다. 방학, 휴가, 연휴 등을 맞아 해파랑길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몰려들 정도로 그 인기는 엄청나다. 참고로 1위는 ‘제주올레’다.

해파랑길 영덕 구간 [사진=두루누비 홈페이지 캡처]
해파랑길 영덕 구간 [사진=두루누비 홈페이지 캡처]

■ 20코스 : 끝없는 산길 끝에서 만난 동해 (강구항~영덕 해맞이 공원 18.1km)

“영덕 블루로드 A코스요? 참 걷기 좋은 길입니다. 저도 친구들과 다녀왔는데, 모두 만족했습니다. 산책하듯 편하게 다녀오시면 됩니다.”

지인이 칭찬을 자자하게 한 해파랑길 20코스, 영덕 블루로드 A코스다. 이미 지난 연차에 블루로드 D코스를 밟아봤기 때문에 영덕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몸소 체감했다. 이번 여행도 기대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트래킹하기 전 지도를 보며 코스를 마음속으로 밟아보고 후기도 읽어보는 게 습관이었으나 지인 조언만 믿고 무작정 강구항에서 시동을 건다. 원래 코스대로라면 강구교를 건너야 하지만 수리 때문에 조금 돌아 강구 대교를 건너간다. 여기서부터 이번 여행이 꼬이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했으나 강구항으로 빠져나가는 강물과 반짝이는 햇빛에 넋을 빼앗기며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고불봉 근처 산길 [사진=김준철 기자]
고불봉 근처 산길 [사진=김준철 기자]

대교를 건너가면 영덕 대게 거리가 나온다. 대게의 고장임을 각인시켜주는 순간이다. 고려 시대 왕건이 영덕과 영해를 거쳐 경주로 가는 도중 축산면 경정리에 있는 ‘치유 마을’에서 영덕 대게를 처음 먹어 본 걸로 전해진다. 그 맛을 인정받은 영덕 대게는 훗날 조선 시대 임금 수라상에 오를 정도의 진상품이 됐고, 시간이 지나며 영덕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영덕 대게 거리엔 170여개의 대게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국내 최대 대게 유통 산지로 연간 500톤가량의 대게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어선들이 강구항에 들어가 대게를 쏟아내며 시작되는 경매장에선 대게를 위판장 바닥에 크기별로 진열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또 매년 4월 초엔 대게를 소재로 ‘영덕 대게 깜짝 경매’, ‘대게 달리기’, ‘대게 잡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영덕 대게 축제를 강구항 일대에서 개최해 관광객의 관심과 참여도를 향상시키고 있다. 이미 식사를 마쳤지만 대게 음식점에서 나오는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향기를 맡으니 다시 허기가 진다.

대게 거리를 빠져나가면 급경사의 골목길이 여행객을 인도한다. 얼마나 경사가 심하면 방금까지 돋았던 입맛이 싹 사라질 정도다. 이후 눈앞에 나타난 건 거대한 산이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서둘러 코스 후기를 찾아본다. 그제야 지인에게 속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적지인 영덕 해맞이 공원까지 주야장천 산길만 걸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반복돼 체력 소모가 심하고, 길이 험해 부상 위험도 크다는 후기가 몇몇 보인다. 하지만 선택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신발을 고쳐 신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산행을 시작한다. 봉화산과 강구봉 등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고, 도로 위에 놓인 금진 구름다리를 건너며 강구항과 방파제, 삼사 해상 공원 등 지나온 스폿을 관망한다.

꽤 오랜 시간을 걸은 것 같지만 코스 전체의 30%도 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체력은 이미 바닥인 듯하다. 봉화산 정상을 둘러보며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솔향이 무한하게 풍겨온다. 재충전한 뒤 고불봉으로 향한다. 고불봉은 예로부터 영덕에서 전해 내려오던 영덕 8경 가운데 하나로 영덕읍 덕곡리와 우곡리, 강구면 하저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동해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봉우리에 걸리면 봉우리도 둥글고 달도 둥글다고 해 망월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불봉은 높을 고(高)에 아니 불(不)을 써 ‘높지 않은 봉우리’라는 뜻으로 쓴다고 하는데 직접 걸어와 보니 기만이나 다름이 없다고 느껴지는 높이와 난도다. 그래도 동쪽으론 풍력 발전 단지, 서쪽으론 오십천과 영덕 읍내가 한 눈에 조망돼 잠깐의 힐링을 마친다.

영덕 해맞이 공원 전망대 [사진=김준철 기자]
영덕 해맞이 공원 전망대 [사진=김준철 기자]

한 봉우리를 열심히 오르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는 능선은 지루함을 달래 줄 풍광마저 받쳐주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을 좋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엄홍길 대장도 분명 곡소리를 내며 진행할 것이라 생각하며 악을 쓰며 한 발 한 발 뗀다. 고불봉 근처 산길을 따라 돌탑이 쌓여있다. 등산객들이 얼마나 심심하면 아슬아슬한 돌탑을 만든 것일까 생각하고 기자도 맨질맨질한 돌을 골라 제발 이번 코스가 빨리 끝나길 빌며 탑 위에 조심히 올려놓는다. 코스 막바지 블루로드 쉼터가 연달아 나오며 쉬어가라고 유혹한다. 임도는 숲이 우거지지 않아 햇빛이 그대로 때려 박고, 풀벌레들을 쫓기 위해 팔을 세차게 휘저은 탓인지 만신이 뻐근하다. 항상 코스 막바지엔 스퍼트를 내는 편이지만 이번 코스는 예외로 엉덩이 붙일 곳만 있으면 바람을 맞으며 숨을 돌리게 된다. 산 중간 중간 솟아있는 풍력 발전기의 프로펠러 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땀을 식힌다.

팍팍한 오르막이 연속하던 블루로드 A코스도 막바지로 치닫는다. 동해 내음의 자취를 훑어 내려간다. 계속해서 산 풍경에 지겨워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찰나, 나무가 걷히고 동해가 펼쳐진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바다가 이렇게 반가운 순간은 없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해맞이 공원 랜드마크인 창포 등대와 그 뒤를 배경으로 하는 동해의 잔물결이 함께 코앞에 아른거린다. 해맞이 공원은 청정 해역과 울창한 해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공원 전면엔 야생 꽃과 향토수종 꽃나무가 색채를 다양하게 하고, 나무 계단이 해안도로와 바다를 얼기설기 엮어 멋진 산책로를 이룬다.

영덕 코스에선 풍력 발전기를 보기 쉽다. [사진=김준철 기자]
영덕 코스에선 풍력 발전기를 보기 쉽다. [사진=김준철 기자]

■ 21코스 : 영덕의 작은 마을과 자연 (영덕 해맞이 공원~축산항 12.9km)

지난 코스 기진맥진할 때까지 산행을 마친 탓에 제대로 해맞이 공원을 둘러보지 못했다.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좁은 숲속 마을길로 내려가니 창포 등대가 우뚝 서있다. 대게 고장답게 집게발로 감싼 아름다운 등대다. 등대부터 해맞이 공원이 시작되는데,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빛의 거리라고 해서 대게 모양의 특별한 가로등이 설치돼 있다. 괜히 영덕 블루로드 B코스를 ‘푸른 대게의 길’이라 부르는 게 아닌 듯하다. 이번 코스는 앞선 코스와 달리 바다를 끼고 걸을 수 있다. 중간 중간 산길이 있으나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고 데크 길이라 볼 것 또한 풍부하다. 영덕 바다와 한적한 어촌 마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포구 하나가 나타난다. 처음 맞는 마을은 대탄리다. 어촌이든 해수욕장이든 인가가 있는 해안이면 어김없이 시원한 바람이 부는 팔각정이 있기 마련이고, 방파제 구실을 함께 하는 듯 돌계단이 해수욕장을 따라 나있다. 블루로드 길은 앞서 밟은 해수욕장들과 달리 장대함 때문이라기보다 바닷가 절경에 시선을 빼앗기는 까닭에 길을 이어가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작아서 정겨운 대탄 해수욕장과 포구를 뒤로하고 오보리로 향한다. 오보 해변 역시 아담하다. 70m 정도의 길이라 동해 해수욕장치고 사람이 많이 모이진 않지만, 각종 보트나 다이빙 등 해상 레저를 즐기기에 유리한 해안선이 갖춰져 있어 피서객들에게 숨겨진 스폿이라 일컬어진다. 더불어 물이 맑아 바다 안 모래알이 다 보일 정도로 청정 해변이다.

노물항 [사진=김준철 기자]
노물항 [사진=김준철 기자]

오보 방파제를 지나니 큰 마을이 앞에 보인다. 돌미역이 유명하다는 노물항인데 아직 철이 아니라 그런지 미역 말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또 노물항 시작점에서 항구를 보고 카메라를 잘 조정하면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과 싱크로율이 꽤 높은 사진을 건질 수 있다. 해안 곳곳엔 이젠 없으면 허전한 낚시꾼들이 자리를 깔고 낚싯대를 드리운다. 방파제를 지나면 한 순간에 산길로 변한다. 위험한 해변은 데크 설치로 안전하고, 송림의 오솔길도 있어 걷는 동시에 힐링이 가능하다. 데크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어 앞을 보니 이번 코스 종착지 근처인 죽도산이 보인다.

노물리에서 석리로 가는 길이 다소 고단하다. 너덜지대가 많고 난간이 있는 바윗길을 돌아가는 구간도 꽤 길다. 오프로드를 한참 걸으니 석동 방파제가 나온다. 규모는 작은 항구지만 여러 가지 어촌 체험을 잘 안내해 놓았다. 잠깐 항구를 구경한 뒤 다시 해안가로 향하는 철 계단을 오른다. 길은 조금 더 거칠어진 야생의 바윗돌 길로, 이번 코스 중 가장 난코스로 꼽히는 구간이다. 기암 해안의 길은 연속되지만 파도가 깎아 놓은 바위의 거친 모습에 눈을 떼기 힘들다.

멀리 경정3리 어촌 마을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경정3리, 경정1리, 경정2리가 뒤섞인 순으로 이어진다. 우선 경정3리 마을 앞엔 500년이나 돼 경상북도 보호수로 지정된 오매향 나무가 여행객을 반긴다. 해안가 바위 틈에서 고고하게 푸르름을 잊지 않고 자라는 소나무가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경정1리 포구 안쪽에 위치한 마을회관을 지나니 다시 해안 오프로드로 연결된다. 경정리 백악기 퇴적암이란 지형이 나온다. 약 1억년 된 백악기 이암(泥巖)과 사암(沙巖)이 파도에 의해 깎여 평탄한 면을 이루는데, 붉은 이암이 펼쳐지는 흔하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다. 경정2리 해변 공원엔 대게들의 가장 좋은 서식지로서 타 지역보다 맛과 질이 우수한 곳이라는 대게 원조 마을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영덕군 축산면 죽도산 [사진=김준철 기자]
영덕군 축산면 죽도산 [사진=김준철 기자]

동해안 작은 마을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경정리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명소로 부상하게 된 건 바로 케이팝(K-POP) 스타 방탄소년단(BTS) 때문이다. 경정항 입구에는 BTS의 화양연화 프롤로그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라는 안내판이 있다. 해당 시리즈를 기점으로 BTS 팬덤이 확장되는 동시에 경정리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게 또 하나의 재미를 더한다. 항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자전거로 동해안을 종주 중인 라이더가 다가와 본인도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지난 코스에서 인적이 드문 산길을 밟은 터라 더 반가운 목소리다. 참고로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영화 팬들에겐 양조위와 장만옥이 중년 남녀의 사랑을 담아낸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기자와 라이더는 서로의 ‘화양연화’를 찍어주며 무사 종주를 응원했다.

아찔한 해변 벼랑 위로 길게 난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한참을 북진하다 보면 ‘블루로드 다리’라는 현수교가 나타난다. 해당 다리는 도로 쪽에서 오면 축산항 입구 현판 인근의 작은 소공원 뒤로 나 있어 경정 원조 마을에서 축산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물길 위를 지나는 100m 정도의 다리로, 2명이 겨우 지나다닐 작은 폭에 약간의 출렁거리는 여운도 맛볼 수 있다. 눈 앞에 나타난 건 죽도산 전망대다. 대나무 숲속 데크로 올라가는 데 마지막 스퍼트를 내본다. 전망대에서 시선을 멀리 던지니 울진 방향 해안이 펼쳐져 보이고, 아래론 축산항과 마을이 올망졸망하게 보인다. 잠깐의 조망을 마치고 종착지 축산항에 도착해 코스를 마무리한다.

대소산 봉수대 [사진=김준철 기자]
대소산 봉수대 [사진=김준철 기자]

■ 22코스 : 영덕의 역사가 이어지는 길 (축산항~고래불 해변 16.3km)

블루로드 C코스, 긴 대단원의 마무리를 향해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간다. 무한정 풀어헤친 마음을 조금씩 여미며 내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본다. 이번 코스가 ‘목은 사색의 길’인 덕분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축산항을 따라 길게 늘어선 대게집에서 대게를 찌며 나오는 연기를 맞으며 첫 발걸음을 뗀다. 얼마 가지 못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또 끝없는 산행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난 20코스에서 예방 주사를 맞은 덕분인지 내성이 생긴 듯하다. 당산목(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 주는 나무)과 남씨 발상지 비석이 이번 코스 초반을 담당한다. 보잘 것 없는 나무와 비석으로 보이나 축산항 자체가 남씨의 시조가 된 영의공이 755년에 안림사로 갔다 귀로에 태풍을 만나 축산항에 표착한 지점으로 알려졌으니 그 의미는 상당하다.

앙상한 해송들이 자유롭게 뻗어나간 길이 대소산을 향해 마지막 침목 계단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다. 동해가 훤히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하니 ‘망월정’이란 현판을 단 정자가 우두커니 등산객을 맞는다. 동해에 떠오른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이름의 봉우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망월의 감을 느껴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대소산 봉수대에 닿았다. 조선시대 통신 수단의 하나로 봉수대 흔적이 특이하게 보전돼 있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봉수대 한 바퀴 도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봉수대에서 바라본 축산항과 죽도산, 이름 모를 영덕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하얀 포말의 파도와 푸른 바다 모습 또한 시원하다.

괴시리 전통마을 [사진=김준철 기자]
괴시리 전통마을 [사진=김준철 기자]

망월봉과 망일봉을 연속으로 지난다. 산책로를 지나 빛 한 줄기가 아쉬운 수풀길을 한참 걷는다. 20코스 데자뷔인 것처럼 숨이 가빠진다. 그나마 나지막한 해송들이 그림같이 둘러쳐져 푸른 산하를 이루는 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피톤치드가 강하게 방출돼 케케묵은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리는 길을 걷는다. 또 나무들이 한 순간 걷히고 한옥 경치가 펼쳐진다. 고려 말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의 탄생지이자 조선 시대 전통 가옥들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전통 마을이다. 본래 이름은 ‘호지촌’인데 목은 이색 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와 비슷하다 해 괴시리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그가 탄생한 고향이자 생가지에서 생애와 사상의 깊은 흔적들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마을의 전통 가옥들은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남아 있는 고택들은 모두 200년 전 지어진 것들로 ‘ㅁ’자형 구조다. 30여호 가옥 가운데 국가 및 문화재 자료도 14점이나 될 정도로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 경북 지역 사대부가의 주택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학자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는 후문이다. 한옥을 두고 내려오는 산길엔 인적이 없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발길 더듬어 한 집 한 집 들여다보며 걷자니 어느덧 몸과 마음도 조선 후기로 물들어 간다.

괴시리 전통 마을을 끝으로 산행을 완전히 매듭짓는다. 어깨와 다리가 한결 가벼워지며 속도를 서서히 낸다. 산 위에서만 보던 동해가 이젠 옷깃에 와 닿는 듯하다. 바다의 고요가 밀려온다는 대진항이다. 방파제 끝 2개의 흰 등대와 빨간 표지등 전경이 깨끗하다. 멀리 대진1리어촌 마을 풍경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코스를 관통하진 않지만 영덕의 아름다운 경치의 정점으로 손꼽히는 상대산 관어대가 굽어 내려 보고 있는 곳이다. 어촌 체험 마을 근처 정자가 생뚱맞게 서있다. 이는 도해단으로 구한말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한 벽산(碧山) 김도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그가 순절한 자리 단과 비를 세운 것이다. 이번 코스는 역사적으로 볼 것이 많은 코스임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다.

덕천 해수욕장 야영장 [사진=김준철 기자]
덕천 해수욕장 야영장 [사진=김준철 기자]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대진 해수욕장 위로 고래불 대교가 놓여 있다. 이 때문인지 해수욕장에서 파라솔과 돗자리를 펴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가 대교를 타고 올라온다. 웃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질 때쯤 대진 해수욕장과 맞닿아 있는 덕천 해수욕장 초입이 시작된다. 덕천 해수욕장은 캠핑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동물 모양을 한 캠핑카 수십 대가 오와 열을 맞춰 주차돼있고,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식사 준비를 하거나 해수욕장을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덕천 해수욕장 야영장 옆 도로 가엔 봉송정이란 누각이 한 채 보인다. 큼지막하고 고풍 있는 정자는 솔숲을 조성했던 고려 중엽 봉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해부사로 있을 때 송천과 덕천 사이 능원에 정자를 세웠고, 수많은 시인 묵객이 정장에 올라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이곳저곳 바닥도 헤지고 건물도 망가져 일체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사이즈가 작은 영리 해수욕장을 빠르게 건너뛴 뒤 종착지인 고래불 해변에 도달한다. 목은 이색 선생이 유년 시절 상대산 해수욕장 어디에서나 보이는 남쪽의 뾰족한 산에 올라가 앞바다의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뿔’이라 말한 것에서 유래됐는데, 해변 길이가 무려 8km에 달하는 긴 백사장 때문에 대진 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의 명사 20리로 불린다. 당장 포털 사이트 지도를 켜 보자. 백사장이 마치 고래가 물을 뿜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해수욕장 오른편 자그마한 둔덕에 올라가 거대한 반원 모양으로 휘어진 해수욕장을 눈에 담으며 영덕 블루로드 코스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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