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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투어] ⑯강릉 경포호와 주문진, 카페거리와 맨발걷기 끝없이 이어지는 명소 행렬

  • Editor. 김준철 기자
  • 입력 2023.11.2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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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마다 걷기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요즘 걷기 여행이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충 둘러보고 돌아서는 관광은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모든 감각을 통해 직접 수집된 오감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관광으로 여행자를 인도합니다. 길 위에서 게으르게 움직이며 풍경과 세상사를 느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재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수요도 점차 늘어나는 중입니다. 천천히 구석구석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여행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편집자 주>

[업다운뉴스 김준철 기자] ‘해파랑길’은 우리나라 동서남북을 잇는 코리아 둘레길의 동해안 구간으로, 부산광역시 오륙도 해맞이 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50km의 장거리 걷기 여행길이다. 해파랑이라는 명칭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색인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한 합성어로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해 4월 ‘2021 걷기 여행 실태조사’를 발표했는데 해파랑길이 2021년 걷기 여행자가 선택한 국내 걷기 여행길 중 2위로 꼽혔다. 만족도 면에선 97.3%의 이용자가 여행에 만족했다고 응답했다. 방학, 휴가, 연휴 등을 맞아 해파랑길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몰려들 정도로 그 인기는 엄청나다. 참고로 1위는 ‘제주올레’다.

해파랑길 강릉 구간 [사진=두루누비 홈페이지 캡처]
해파랑길 강릉 구간 [사진=두루누비 홈페이지 캡처]

■ 39코스 : 9월 15일 강릉 대표 해송 숲길과 호숫길, 그리고 문화유산 길(솔바람다리~사천진리 해변 16.1km)

흐린 날 남항진 해변은 조용하다. 남항진과 안목 해변 사이 바다를 횡단하는 아라나비 집라인도 운행을 중지해 휑한 바람만 불고, 공사장 몇몇 인부만이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바다를 유유히 바라본다. 지난 코스 종착지인 솔바람 다리가 통행 금지돼 있다. 분명 지난 트래킹에선 사람들이 건너가는 걸 봤는데, 데크 시공으로 인해 인부들이 길을 막고 작업 중이다. 안목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솔바람 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낭패다. 결국 한참 돌아 공항 대교를 도보로 넘어간다. 5분이면 넘어갈 거리를 무려 30분 이상 지체했다. 공항 대교에서 보이는 솔바람 다리를 억울한 듯 힐끗 꼬나보며 늦은 일정을 시작한다.

안목항으로도 불리는 강릉항이 안목을 처음 맞는다. 울릉도로 가는 배편이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안목 해변 인기는 강릉항 주변에 세워진 수많은 자가용으로 미뤄 짐작할만하다. 강릉항을 빠져나와 직진하면 말로만 듣던 커피 거리, 카페 거리가 연달아 나온다. 카페·커피 거리 유래는 1990년대 들어서 국내 커피 명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관광 명소로 떠오른 데서 시작된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 커피 마니아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첫 카페부터 마지막 카페까지 거리가 약 500m로 건물마다 카페 1~2개씩 자리 잡고 있다. 거리를 혼자 지나니 선뜻 커피를 마시러 들어가지지 않는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풍경도 봐야 하는데, 날이 우중충해 기분이 나지 않을뿐더러 앞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고소한 커피 냄새로 대신하고 안목 해변으로 향한다. 안목이라는 이름은 남항진에서 송정으로 가는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노란 커피 주전자와 동계 올림픽 마스코트 등 조형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관광객들도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 해변을 눈에 담는데 여념이 없다.

안목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안목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안목 해변을 지나면 소나무 숲 사이로 뚫린 길을 따라 송정 해변으로 향한다. 굵직한 소나무들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길이가 얼마나 긴지 시선을 멀리 뻗어 봐도 소나무가 끝나지 않는다. 시원한 솔향을 맡으며 길을 이어가는 게 여행객에겐 축복일 따름이다. 또 송정 해변 소나무 숲은 맨발 걷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7월 강릉시는 피서철을 맞아 ‘송정 해변 및 해송길 맨발 걷기 힐링 캠프’를 개최했다. 이날도 일부 여행객과 주민들이 손에 슬리퍼를 들고 맨발로 천천히 길을 따라가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맨발로 길을 걷는 여행객 옆으로 청설모가 다가와 솔방울 씨앗을 먹는다. 사진을 찍으려 가까이 다가가면 금세 나무를 타고 쪼르르 올라간다. 숨을 죽이고 카메라 줌을 최대한 당겨 볼이 빵빵한 청설모를 흐뭇하게 찍는다.

송정 해수욕장을 옆에 두고 솔길로만 걸으니 거리 감각이 없어진다. 어디쯤 왔는지 보니 강문 초입이 나타난다. 강문동은 이름 그대로 강의 문, 강물이 드나드는 어귀란 뜻으로 경포 하구에서 초당동과 나란히 붙어 있다. 인근 초당 순두부 마을 때문인지 강문 해변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해변을 담아가라고 설치해 놓은 캔버스 포토존에 몸을 욱여넣고 동해를 함께 담는다. 여행객은 색다른 모양의 다리, 강문 솟대 다리를 배경으로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강문 솟대 다리는 강문 해변과 경포 해변으로 나뉘는 바다 위에 있는 다리다. 마을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를 높이 달아맨 것에서 유래된 솟대는 민간 신앙 상징물로 장대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했던 장대를 말한다.

강문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강문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강문을 지나 북진해 경포 해수욕장 초입을 지나면 경포호가 나온다. 이번 코스 중반은 경포호를 한 바퀴 돌면서 호수 주변 여러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바다와 이어지는 자연 석호다. 2004년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바닷물을 막던 보를 터뜨리면서 바닷물이 대거 유입돼 염호로 바뀌고 있다. 인근 지역 수질은 개선됐으나, 민물 유입이 줄어들어 경포호는 사실상 바다로 변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실제 일반적인 호수에선 살 수 없는 파래와 같은 홍조류까지 볼 수 있다. 연이 올라오는 초여름에 가면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답다고 하고, 봄에 열리는 벚꽃 축제 역시 운치 있다는 후문이다.

넓은 경포호를 오른쪽에 두고 발은 움직이지만 시선은 고요한 호수를 뗄 수 없다. 둘레만 4.32km나 되는 큰 호수인데 물새들의 물장구로 퍼지는 파동을 제외하면 움직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마음도 차분히 비워낼 수 있는 스폿이다. 중간중간 물새와 오리가 말벗을 해주겠다는 듯 날아든다. 특히 오리들은 호수 안 먹이를 찾기 위해서인지 반복적으로 고개를 물 속에 박았다가 들었다가 하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어린 아이들의 탄성과 실소를 유발한다. 호수가 워낙 큰 탓에 여행객은 자전거나 사륜차를 대여해 편하게 관광한다. 특히 젊은 여성 관광객들은 자연이 그리 재밌는지 바이크를 한 발 한 발 밟을 때마다 경쾌한 웃음 소리를 내며 가고, 남성 관광객들은 바이크를 탄 다른 관광객과 경쟁하듯 파이팅을 불어 넣으며 사륜차를 힘차게 끈다. 약 7~8km나 걸어 피로가 몰려올 수 있는 순간 에너지 레벨을 올리는 자극제다.

허균·허난설현 생가 [사진=김준철 기자]
허균·허난설현 생가 [사진=김준철 기자]

경포호를 4분의 1정도 돌면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이 나온다. 아파트 7~8층 높이는 족히 될 것 같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나무줄기 하나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꺾여 떨어졌는데 땅을 진동할 정도였으니 그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깜짝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허균·허난설헌 생가 터로 들어간다. 우리나라 최초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창’ 저자 허균과 그의 누이이자 조선시대 유명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 사상과 문학 세계를 연구하고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돌아본다. 바깥에서 조잘대던 관광객들도 한옥이 주는 고즈넉함 때문인지 이내 조용해지고, 생가 터엔 나무를 스치고 흘러오는 바람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힌다. 이렇게 조용한 공간이라면 글쓰기도 잘됐을 것이 분명하다. 생가 터 건너편으론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관과 함께 인형극도 열리고 전통차 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시간 관계상 건너뛰었으나 허균, 허난설헌 작품과 일대기에 관심이 많은 여행객은 둘러봐도 좋을 선택지다.

경포호로 빠져나와 길을 이어간다. 호수 절반을 조금 넘으면 관동팔경 중 하나인 경포대가 나온다. 본래 강원특별자치도지방유형문화재였지만 2019년 12월 보물로 승격됐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의 누대로 강릉 오죽헌에 있던 율곡 이이가 10세 때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해 걸었다고 알려졌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알맞게 우거져 운치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미 관광객들이 누각에 올라가 한 눈에 보이는 경포호를 조망하기 바쁘다. 경포대에서 내려오면 또 다시 경포호를 따라 걷게 된다. 경포호 걷기 시작부터 시야에 걸린 스카이베이 경포 호텔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초입과 달리 후반부는 볼거리도 줄어 슬슬 지겨워질 찰나 경포 해수욕장이 나온다. ‘바바’, ‘쿠쿠’라는 이름의 느린 우체통이 관광객 눈을 사로잡는다. 엽서를 써넣으면 1년 뒤 받아볼 수 있다. 여행지의 추억을 2배로 키울 수 있는 독특한 서비스로 몇몇 여행객이 벤치에 걸터앉아 엽서를 쓴다. 경포 해변 중앙 광장에서 뻥 뚫린 해안을 보고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충전시킨 뒤 종착지를 향해 발을 뗀다.

경포호 [사진=김준철 기자]
경포호 [사진=김준철 기자]

39코스 후반부는 작은 해변들이 연달아 나오며 바닷길을 따라 걷게 된다. 경포 해수욕장을 지나 처음 만난 해변은 사근진 해변이다. 해변은 펜션들과 캠핑족 차지다. 멀리서 알록달록한 방파제가 보인다. 테트라포트 중앙에 해중 공원 전망대가 우뚝 솟아있다. 언뜻 보면 천사의 날개와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전망대를 지나치지 못한 많은 여행객이 끝 모서리에 줄을 서 사진 찍기를 기다린다. 다음은 순긋해변이다. 순긋이라는 말의 의미가 개울의 안쪽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 포털 사이트 지도에도 해변은 해안과 조금 떨어진 곳에 표시돼 있다. 순포 해변 길 건너에는 순포 습지가 있다. 동해안의 대표적인 석호들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석호의 전형적인 특성을 간직하고 있고 늪으로 변하고 있는 습지를 되살리기 위해 201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제 목적지까지 해변 한 개만이 남았다. 사천진항 종료 지점을 앞두고 사천 해변에서 숨을 돌린다. 해송 숲이 넓게 우거져 있고 깨끗한 백사장과 얕은 수심으로 조용하게 피서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스퍼트를 낸다. 사천면 사기막리 곤신봉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드넓은 평야를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는 사천천을 하평교를 통해 넘는다. 하평교를 넘자마자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비가 쏟아진다. 바지를 걷고 부랴부랴 강둑을 따라 항구로 진입한다. 사천진 물회 거리, 방파제, 해변 등 둘러볼 곳이 많지만 다음 일정에서 보기로 하고 사천진 해변 입구에서 코스를 마무리한다.

■ 40코스 : 9월 16일 드라마 촬영지 회상과 주문진 활기(사천진리 해변~주문진 해변 17.4km)

사천진 초입은 물회 거리가 반긴다. 사천진항은 이곳에서 나는 제철 싱싱한 해산물로 가득 채운 물회로 이름이 나면서 사천 물회 마을로 불린다. 점심시간이 다가와 허름한 물회집으로 들어가는 여행객을 따라간다. 맛과 싱싱함은 물론이고 ‘물 반 회 반’이라 해도 될 정도로 물회 양이 많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길을 힘차게 밟는다. 사천진은 최근 들어 관광지로 개발돼 새로운 항구로서 주목을 받고, 날이 갈수록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사천진(沙川津) 해변은 이름에 모래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모래가 곱고 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천진 해변 모래는 침식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2019년 사천진 해변 너비는 40m에 달했으나, 2021년 침식이 심한 지역은 3m까지 줄어들었다. 항구와 해변 발전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모래를 지키기 위해 방사제 등을 지어 자연과 공생하려는 노력을 이어갈 때다.

해변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바윗덩이가 촘촘히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사천 교문암으로 큰 바위 밑 이무기가 바위를 깨고 떠나는 바람에 동강 난 모습이 마치 문과 같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돌들을 파도가 쌓아 올린 것인지, 아니면 큰 바위가 파도에 깎여 쪼개진 것인지 아무리 살펴봐도 원리를 알 수 없다. 허균의 ‘교산’이라는 호 역시 이 지명에서 비롯됐는데, 혁신을 꿈꾸던 허균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스폿이다. 교문암을 지나면 조그마한 바위섬이 나온다. 가까이 가보니 섬과 연결한 구름 다리가 있는데 파도가 워낙 세게 치는 탓에 다리가 잠길 정도다.

사천 교문암 [사진=김준철 기자]
사천 교문암 [사진=김준철 기자]

멀리서 바위섬을 잠시 바라본 뒤 진리 해변길 도로를 따라서 길을 이어간다. 해변에 부딪히는 성난 파도 소리가 귀를 스치고 하늘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운치를 더하는 길이다. 지난 코스와 마찬가지로 길을 걷다가 ‘솔향 강릉’이라는 표시가 곳곳에 보인다. 그만큼 강릉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많다는 증거다.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해송 숲은 청량한 느낌을 준다. 강릉원주대학교 해양 생물 연구센터와 국립수산과학원 동해 수산 연구소를 지나 연곡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도 딱 그렇다. 도로 옆 길을 걷지만 하늘로 뻗은 소나무들이 길 양 옆에서 나무 터널을 만들어 주는 독특한 풍경을 맞는다. 연곡 해변 표지판을 만나지만 길은 바다로 가지 않는다. 바닷바람이 갑자기 세지는 것으로 해수욕장이 있는 걸 알아차릴 뿐이다. 대신 숲 안으로 들어가 송림욕을 맘껏 즐긴다.

영진교를 건너며 바라본 연곡천 하구의 모습은 느릿느릿하다. 넓은 모래톱을 향해 날아드는 새들의 날갯짓도 슬로 모션을 건 듯하다. 잠시 안쪽으로 길을 바꿔 산으로 올라간다.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면 영진리 고분군이 나온다. 소나무 숲 구릉에 위치한 무덤들로 과거엔 다수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몇 기만 확인될 뿐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과 무덤의 형식을 살펴볼 때, 무덤은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오랜 기간 걸쳐 만들어졌을 것으로 관측된다. 유물은 지방색이 강하게 나타나 신라 시대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니 기념물로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한 주문진 [사진=김준철 기자]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한 주문진 [사진=김준철 기자]

구릉을 내려오면 해안로가 다시 이어진다. 조그마한 어촌 마을인 영진이란 이름은 ‘바다에서 나는 어물을 거둬들인다’, ‘바다를 거느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다 쪽으로 나가자 비는 거세진다. 우산을 써 상반신은 멀쩡하지만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젖은 지 오래다. 영진 해변 모래도 깨끗해 보여 신발을 벗고 맨발로 젖은 모래를 밟는다. 요즘 중장년층 사이에서 맨발 걷기(어싱)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면 장애와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 치료와 예방을 위해 맨발로 걷는 이가 부쩍 늘었다고 하는데, 직접 대자연 속에서 어싱을 해보니 건강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발가락 사이사이 모래가 들어오며 간질거리고,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니 더욱 더 속도를 늦추고 해안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어려워 얼마 못 가 숨이 차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도로를 따라 데크가 나 있어 발을 씻고 다시 올라온다. 영진 해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데크길의 감성 글귀다. 조그만 나무 판자에 그림과 짧은 글귀를 써 데크 사이사이 매달아 놨는데 마음 저릿한 글들이 많아 걸음을 멈추게 된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특히 이 글귀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바다 멀리 바라본다. 해파랑길을 걷는 여행객 혹은 인생의 목적지를 찾고 있는 고행자를 저격하는 말이 아닐까.

주문진 등대 [사진=김준철 기자]
주문진 등대 [사진=김준철 기자]

영진 해변을 지나 주문진으로 가까이 갈수록 아기자기한 카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차들이 길가에 주차돼 있다.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여행객이 드문드문 내리기 시작한다. 바로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도깨비’의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 ‘도깨비 방파제’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는 오래됐으나, 여전히 두 주인공처럼 자세를 취하고 사진 찍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도깨비 방파제 주위로 해당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벽화와 조형물 등에 여럿 녹아 있다.

신리하교를 건너 주문진항 방면으로 직진한다. 주문진항은 1927년 개항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어항으로 알려졌다. 화물선과 어선이 주로 입출항해 동해안의 주요 어항 기지로 꼽힌다. 수산 시장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1일과 6일 열리는 5일장도 있고, 종합 시장, 건어물 시장, 어민 수산 시장까지 여러 시장이 공존해 다채로운 재미와 맛을 뽐내는 곳이다. 곰치와 오징어, 홍게 등을 비롯한 수산물들이 좌판대에서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상인들은 관광객과 눈을 맞추며 호객하고, 그 옆을 어부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게 꼭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분위기다.

주문진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주문진 해변 [사진=김준철 기자]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해안길을 벗어나 주문진 등대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고서야 차분해진다. 골목길엔 과거 어민들 삶의 애환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그 길을 따라 바다를 즐기며 가면 등대가 나타난다. 주문진 등대는 조선총독부가 1918년 강원도에 처음 세운 것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51년 복구됐다. 주문진항이 1910년대 부산~원산 간 항로 중간 기항지가 되면서 여객선과 화물선이 입항하기 시작했는데 등대 불빛을 식별하기 용이했다고 전해진다. 과거엔 주문산 봉수가 있던 곳이다. 국가 위기 상황을 전달했던 통신 기능이 현재는 산업 활동에 이용되는 기능의 변모를 보이고 있다. 주문진 등대에서 바라본 주문진항과 강릉항 방면 전경은 뻥 뚫려 휴식을 돕는 보조제 역할을 한다.

해파랑길은 등대를 지나 해안로로 내려간다. 앞쪽으론 작은 마을 어항인 오리진항이 반기고, 멀리로는 소돌항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소돌항은 마을 모양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해 본래 우암진(牛岩津)이라고 불리다가 소돌로 바꾼 것이다. 소돌항은 해안 기암괴석과 그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옛날에 노부부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 해 아들을 얻은 후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 때문인지 타지에서 오는 관광객이 많으며 특히 신혼 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더불어 소돌항은 1968년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올해 초 종영한 드라마 ‘더글로리’ 촬영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배경이 된 장소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소돌 해변과 주문진 해변은 서로 이어져 있는 해변이다. 바다 전망대를 내려와 주문진 해변의 목적지 근처로 가자 해파랑 쉼터가 나온다. 쉼터지기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와 빗길에 고생도 많다고 토닥여준다. 따뜻한 쉼터로 들어가 숨을 돌리고 위로를 받으며 이번 코스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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