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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훈의 이야기力] 고갈, 정처 없는 표류 (上)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8.18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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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 시력, 청력, 근력, 정신력…. 사람이 지닌 힘의 종류는 많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럼 여러분의 '이야기력'은 어떤가요? 이야기력은 '내가 지닌 이야기의 힘'을 뜻합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쌓아왔고, 어떤 이야기를 꿈꾸며,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여지훈의 이야기力]은 “좋은 이야기가 좋은 세계를 만든다”는 믿음 아래, 차근하고도 꾸준히 좋은 이야기를 쌓고 나누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편집자 주>

토요일과 일요일, 광복절인 월요일에 이르기까지 모처럼 만의 긴 여가를 맞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단 한 줄의 문장도 써지지 않았다.

평소 글을 즐겨 쓰는 기자에겐 업무에 치여 정신없는 평일보다는 이런 주말과 공휴일이야말로 소위 ‘글감’이 떠오르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사흘 내내 문장 하나조차 쓰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실망과 좌절을 가져다주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온 세상이 문제라고 말하는 듯한 이야기의 범람은 때로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준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온 세상이 문제라고 말하는 듯한 이야기의 범람은 때로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준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또다시 때가 왔군.’

다행히 처음 맞이하는 경험은 아니었다. 기자라는 명패를 달고 다닌 이래 이미 네댓 번 겪어봤던지라 처음 겪었을 때만큼 당황하진 않았다.

간간이 그런 날이 있었다. 수많은 정보를 눈에 담지만 흡사 뇌와 눈 사이에 강력한 차단막이라도 생긴 양 어떤 정보도 유의미하게 해석되지 않는 날, 다른 매체에선 중요한 기사처럼 떠들썩하게 보도하지만 정작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심드렁하게만 느껴지는 날, 그래도 전문 직업인이라는 인식 아래 내키지 않음에도 겨우겨우 마음을 부여잡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아도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는 날.

이유야 많았다. 일상에서의 사건 사고가 영향을 미쳐 그러기도 했고, 대인관계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그러기도 했다. 스스로의 능력에 비관해 그런 적도 있었으며, 그저 한동안 지나치게 일에 몰두한 나머지 제풀에 지쳐 그런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직접 작성한 어제의 기사와 오늘의 기사끼리도 경합하는 이 끝없는 이야기의 바다에서, 고작해야 글 하나 더하는 게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깊은 회의감으로 자주 귀결되곤 했다. 고갈된 정신과 대비되는 이 넘쳐나는 이야기의 바다는 지친 이를 더욱 짓누르는 무정형의 괴물과도 같았고, 그럴 때마다 몇 날 며칠이고 괴물을 피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곤 했다.

장기간 지속되는 인플레이션과 그에 대응하는 각국의 통화정책, 대만을 중심에 두고 고조되는 미중 갈등, 대러시아 제재에 대한 EU(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온도 차, 이런 거창한 이슈까지 갈 것도 없었다. 8.15 광복절을 맞아 서울 곳곳에서 열린 도심 집회, 음식을 먹고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속인 유명 유튜버, 장마철 거듭되는 폭우로 초래된 산사태, 국내 기업들에 관한 이런저런 논란거리까지…. 국내에서만 이슈는 차고도 넘쳤다.

비록 사건 사고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겠으나, 너무 많은 이야기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온 세상이 문제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이야기의 범람이 기자에겐 평소보다 유난히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줬다.

‘문제투성이 세계.’

밀려오는 피로감은 급기야 원인 모를 역겨움으로까지 이어졌고,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고 집 밖으로 나왔다. 흐린 하늘 아래로는 평소보다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맞은편 처마 밑에 비스듬히 꽂힌 태극기가 요란스레 춤을 추고 있었다. 오래전 걸었던 사막을 연상시키는 바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건조하기 그지없던 그때와 달리 바람은 한껏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바람을 맞으며 정처 없이 걸었다. 금세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도 꽤 많은 이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한 해 넘도록 거주하며 자연스레 익힌 얼굴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낯선 얼굴이었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전 그 숱한 뉴스들이 전하던 메시지와 달리, 그들 대부분의 일상은 대체로 평온해 보였다. 적어도 그들에게 오늘의 가장 심각한 이야기는 나라 간의 갈등도, 유명인의 사기행각도, 산사태도 아닌, 오늘 가족과 먹을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하는 일, 혹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흘 연휴의 끝을 어떻게 기분 좋게 마무리할 것인지 정도인 듯싶었다.

‘저들에게 오늘 포털을 채운 수백 개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수많은 이야기의 난립 속에서 겨우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한 편의 기사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신문산업 사업체 수 및 종류별 비중 추이 [사진=한국언론진흥재단 보고서 캡처]
신문산업 사업체 수 및 종류별 비중 추이 [사진=한국언론진흥재단 보고서 캡처]

짧으면 몇 시간, 길어야 며칠에 불과한 기사의 수명, 그 단명하는 운명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기사라도 고작 며칠이면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게 대부분 기사가 맞게 될 숙명이었다. 그런 기사에 과연 정성을 쏟을 필요가 있을까. 구태여 열심히 자료를 찾고, 취재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수십 차례 반복해 읽으며 문장을 다듬는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을까.

매일 같이 이야기를 찾고, 만들고, 전하는 직업을 가진 이로서 언젠가는 진지하게 고뇌했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기자로 활동하는 그간의 시간 동안 이런 의문을 던져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답을 찾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1 신문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종이 신문과 인터넷신문 수는 각각 1484개, 3594개로 둘을 합치면 총 5078개였다. 또 해가 갈수록 전체 신문산업 중 종이신문 비중은 감소하고 인터넷신문 비중은 늘어나는 추세였다.

신문산업 전체 종사자는 4만4693명으로, 이중 기자직만 2만9243명이었다. 기자직 중 종이신문에 종사하는 이들은 1만5223명, 인터넷신문에 종사하는 이들은 1만4020명이었다. 매체 수로만 따지면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 간 2배가 넘는 차이에도 불구, 기자 수가 비슷하다는 것은 그만큼 소규모 인원으로 운영되는 인터넷신문 수가 많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3594개의 인터넷신문 중 1~4인의 종사자만 있는 경우가 1856개, 5~9인이 있는 경우가 1412개로, 1~9인의 소규모 언론이 인터넷신문 대부분을 차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이들 각 매체가 하루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사 건수와 외부로부터 제공받아 올리는 기사 건수 모두 1~10건에 집중돼 있었다. 보수적으로 각각 3건이라고 단순 계산하더라도 한 매체당 하루 기사 생성 수만 6건이며, 이를 3600여개 인터넷신문에 적용하면 인터넷신문에서만 하루 2만개가 넘는 기사가 쏟아진다는 얘기다. 기사의 난립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기사의 대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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