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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 논객마당] 금융회사의 모럴 해저드

  • Editor. 업다운뉴스
  • 입력 2016.02.2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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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저금리 덕분에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회사들은 은행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95%에 이른다며 돈 없는 직장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용불량자들에게까지 “집을 사라. 무조건 남는다.”며 꼬드겼다. 꼬임에 넘어간 이들은 2008년초 금리가 오르자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줄줄이 파산하고, 대출금 회수 불능에 빠진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세계 금융위기를 부른 서브프라임 모기지(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담보대출) 사태이다. 최근 개봉한 미국 영화 ‘빅쇼트’(Big Short)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격이 하락하는 쪽에 베팅하는 것을 뜻하는 증권 용어인 빅쇼트는 급락이 예상되는 자산을 공매도(주식을 빌려 미리 판 뒤 주가가 떨어졌을 때 사서 되돌려주고 차익을 챙김)해 돈을 버는 투자 기법이다. 부동산 버블이 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조짐이 나타났지만 탐욕 때문에 월가가 이를 외면하는 것을 알아챈 금융회사 직원들이 고객이 아니라 회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품을 거래하는 모럴 해저드 현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영화이다.

이런 금융회사의 모럴 해저드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다. 내달 14일부터 판매될 예정인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시장’의 선점을 위한 금융회사들의 과열 경쟁이 대표적이다.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ISA는 예금과 적금, 펀드 등 본인이 갖고 있는 금융상품을 이 계좌 하나에 통합해서 간편하게 운용할 수 있다. 예·적금계좌 따로, 펀드 계좌 따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데다 비과세 혜택도 있다. ISA에 담아둔 금융상품(예·적금, 펀드 등)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조건에 따라 최대 250만원까지 면세 혜택이 있다. 금융투자협회는 올해 800만 계좌, 24조원 정도의 신규 자금이 ISA에 흘러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은행권에서는 사전 가입자를 대상으로 자동차와 골드바 등 값비싼 경품을 내거는 한편 영업점에 계좌유치 할당을 내리는 등 고강도 영업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증권가에서도 사전 가입자에게 5%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수 기회를 제공하는 이벤트를 선보이는 등 고객 유치에 ‘혈안’이 돼 있는 모습이다. 금융회사가 ISA 고객 유치에 과열 경쟁 조짐을 보이는 이유는 ISA가 의무 가입기간(3~5년)이 있는 상품인 만큼 고객 돈을 많이 끌어들일수록 수수료를 더 두둑이 챙길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초저금리로 인해 은행권의 이자 수익이 계속 줄어드는 마당에 비싼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상품은 금융회사로서는 좋은 먹이감인 셈이다.

문제는 ISA에 담길 상품이나 수수료 등 아직 실체도 나오지 않은 상품인 만큼 향후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데 있다. 일반 예·적금 상품을 ISA에 담아 이자소득세(15.4%) 면제 혜택을 받더라도 고객은 신탁 수수료를 내야 하는 탓에 정작 고객 몫으로 돌아오는 잔액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ISA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전쟁이나 ‘제2의 키코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00조원 규모의 시장을 열며 국민재테크 상품으로 떠올랐던 ELS 시장은 요즘 초주검이 된 상태이다. 홍콩증시가 급락하면서 이를 기초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ELS 시장이 엄청난 평가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2018년 이후 만기가 도래하는 만큼 그 사이에 홍콩 H지수가 회복되면 손해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하지만,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2조원 이상의 손실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키코사태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환헤지 통화옵션상품에 가입했던 중소기업들이 원화 약세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일부 기업이 도산한 사건이다. 당시 738개 기업이 10조원 이상의 키코 계약을 맺었으며 3조 2000억원의 손실을 봤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이성이 탐욕과 만나면 통제가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대졸 5000만원에 명예퇴직 명목으로 3년치 연봉과 자녀 학자금까지 제공하는 금융회사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싸늘하다. 회사 실적을 위해 고객들의 이익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은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금융회사는 신뢰를 먹고산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김규환 서울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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