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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 논객마당] 유인태는 깨어 있었다

  • Editor. 업다운뉴스
  • 입력 2016.02.2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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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4시 20분 쯤 국회 본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의장석을 대신 지킨 정갑윤 부의장이 대정부질문을 위해 열린 본회의를 마무리하기 직전 재석 의원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끝까지 자리를 지킨 48명의 의원들에게 “20대 총선에서 반드시 당선돼 돌아오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말엔 덕담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그 말은 곧 회의에 결석했거나 재석하지 않은 의원들을 향한 가시돋친 반어(反語)였다.

이날 정 부의장은 정의화 의장 대신 회의를 진행하면서 정족수 미달로 애를 먹었다. 오후 2시 회의 속개 때도 재적 5분의 1인 정족수(59명)가 채워지지 않아 한동안 의원들이 입장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랬던 터이고 보니 평소 나긋나긋하게 회의를 이끌곤 하던 그도 내심으론 어지간히 열을 받았던 것 같았다.

의정 모니터 단체인 ‘열려라!국회’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당일 오전 개회 시점의 출석 의원 수는 재적 293명 중 221명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의원들이 출석 체크만 하고 재석하지 않은 채 나가서 딴청을 했다는 얘기다. 그들 중엔 얼굴 도장만 찍은 뒤 총선 대비를 위해 부리나케 지역구로 향한 이들도 포함돼 있을 터였다. 

이날 정 부의장으로부터 “살아 돌아오라”는 간곡한 덕담을 들은 이 중엔 3선 고참인 더불어민주당 유인태 의원도 끼어 있었다. 그로부터 6일 뒤 컷오프 대상자로 분류돼 당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로부터 개별통보를 받은 그 유인태였다.

유인태의 컷오프 탈락은 문희상 의원의 그 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유인태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올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가 유인태다. 그러면서도 늘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은 가운데 당내에서 극단의 대립을 만류함으로써 정치를 정치답게 만들어온 이가 또한 유인태다. 그는 부드러움을 유지하면서도 권력 앞에서 굴신하지 않고 소신을 꺾지 않은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당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석상에서도 중언부언 사설이 길어지면 곧바로 ‘수면 모드’로 들어가 ‘엽기 수석’으로 불리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상식적인 인간이었다. 

유인태에게서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공치사가 느껴지지 않는다. 반민주라는 ‘악’에 맞서 ‘꽃병’(화염병)과 ‘떡’(돌멩이)을 들고 ‘가투’(가두투쟁)에 나섰던 전력을 평생 우려먹으며 보상을 누리려 하는 일부 86세대들에 비하면 유인태는 확실히 거인이었다. 유인태에게인들 왜 한과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없었겠는가? 마는, 그는 언제나 초탈한 듯 절제된 행동을 유지해 왔다.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방문은 유인태가 왜 거인인지를 보여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민주 의원들은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분위기를 반영하듯 의석마다 놓여진 모니터의 뒷면에 ‘국정교과서 반대’라 적힌 인쇄물을 부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정면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인태는 박 대통령 시정연설 직전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회에 온 대통령을 상대로 시위를 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동료들의 행동을 제지하려 들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을 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모시고 국회를 방문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설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날 유인태는 “동료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하는게 미안해서” 차마 의석에 앉아 있지 못하고 본회의장 밖에 나가 모니터로 박 대통령 시정연설을 들었다.

유인태를 더욱 유인태답게 한 일은 컷오프 탈락 통보를 받은 직후 가장 먼저 입장자료를 내고 ‘쿨’하게 당의 결정을 수용한 것이었다. 속으로야 열불이 났겠지만 유인태는 기자들의 전화가 쇄도하자 곧바로 보도자료를 내고 “저의 부족함 탓이라 생각한다.” “저의 물러남이 당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보도자료에는 진작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다 못보일 꼴을 내보인데 대한 회한도 은연중 녹아 있었다.

유인태의 컷오프 탈락을 아쉬워 하는 이들은 더민주의 이번 물갈이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들을 내놓고 있다. 공관위에 현역 의원이 한명도 포함되지 않은 까닭에 컷오프 작업이 정무적 판단 없이 의정활동 등 계량화된 기준에 의해 기계적으로만 이뤄졌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심지어 홍창선 공관위원장조차 컷오프 명단을 보고 개별통보를 저어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유인태의 경우 19대 국회 본회의 출석률(이하 ‘열려라!국회’의 2월 19일 현재 집계 기준)은 94.19%로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반면 법안 발의 건수는 9건에 불과할 만큼 적은게 사실이다. 19대 국회에서 100건 이상의 법안을 발의한 의원이 31명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법안 발의 실적은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나름 역할이 있는 유인태 같은 고참 의원들을 상대로 회의 출석률이나 법안 발의 건수 등을 적용해 점수를 계량화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특히 법안 발의 건수의 경우 의정 활동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에서조차 의원 평가항목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합리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항목이다. 통과가 되든 말든 법안 발의를 남용하는 예도 적지 않은 탓이다.  

유인태의 공천 탈락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더민주의 공천 물갈이 노력은 큰 틀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더민주의 이번 공천 물갈이는 계파 싸움에 찌든 구태의연한 한국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됐음에 틀림 없다. 그런 면에서 유인태의 ‘쿨’한 컷오프 수용도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향후 이어질 공천 물갈이에서는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적용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시스템도 사람이 만드는 것인 만큼 노소(老少) 조화와 정무적 판단을 담보할 길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더민주가 시스템에 최적화된, 영악한 신진들로만 득실댄다면 그 역시 끔찍한 일이다.             

박해옥 업다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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