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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운 논객마당] 무제한 토론이 '파행'인가?

  • Editor. 업다운뉴스
  • 입력 2016.03.0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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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내 날 듯 오래됐으면서도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 의사결정 이론 중 하나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모델이다. 이 모델은 오늘날 인지과학과 심리학, 경영학은 물론 정치학에서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간략히 정의하자면 인간은 의사결정을 할 때 제한된 정보 범위 안에서 때론 편법을 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제한된 합리성’ 모델을 따르는 유권자들이 많아질수록 정치 개혁이 보다 수월해진다고 말한다. 이 모델에 익숙해진 유권자들이라면 선거에서 후보의 일시적 말실수나 의상, 외모, 학습된 매너, 꾸며내는 행동 등등보다는 당대의 현안과 관련한 후보자의 식견이나 능력, 인성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제한된 합리성’ 모델에 의해 움직이도록 돕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하는 신문기사나 방송 보도, 후보자의 정견 발표 등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러나 ‘제한된 합리성’ 모델을 이행하도록 돕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는 토론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결국 선출직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후보자나 기성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토론은 정치 개혁을 촉진하는 최고의 수단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최근 국회에 릴레이식 무제한 토론의 장이 마련됐던 것은 한국 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축복이었다. 지난 23일 저녁 무렵부터 만 8일 하고도 26분을 더한 시간(총 192시간 26분)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서 실시된 릴레이식 무제한 토론은 정치에서 토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의 무제한 토론이 지닌 의미와 가져다준 파생 효과는 단순하지 않다. 단지 테러방지법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모든 국민들이 인지하고 새로운 각성을 얻은 것만을 성과로 치고자 한다면 그 해석은 너무도 단세포적이다. 물론 이번의 무제한 토론은 테러방지법에 스며 있는 독소적 요소 - 또는 독소화할 가능성이 있는 요소 - 들을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도록 도와준 측면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무제한 토론의 의미와 효과는 의회민주주의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수단이 토론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레 일깨워주었다는데 있다. 이번에 많은 사람들은 TV를 통해, 또는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무제한 토론을 지켜보면서 “그래 정치는 저렇게 하는거야!” “의회민주주의가 바로 이런거야!”라고 무릎을 쳤다.

무제한 토론 주자로 나선 의원들이 등단을 전후해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유권자들과 전례 없이 활발한 소통을 한 것도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국회의원과 유권자의 소통은 정치 무관심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의정치의 맹점으로 부상한 대의권(代議權)의 오남용 우려를 씻어줄 가능성마저 보여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강기정 의원 같은 이는 국회에서의 몸싸움 전력으로 인해 자신이 공천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을 상기하면서 “진작 무제한 토론이 있었더라면...”이라고 한탄했다. 이 제도가 보다 일찍 활용됐더라면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몸싸움을 벌일 일도, 그로 인해 공천 탈락의 아픔을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탄식 어린 발언이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강기정 의원의 한탄에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짐작된다. 확실히 이번 무제한 토론은 정치를 정치답게, 국회의원을 국회의원답게 만들어준 이벤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일 남짓한 릴레이식 무제한 토론을 “국회 파행”으로 단정하면서 “국회 정상화” 운운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 것은 한편으로 한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 국회법에 보장된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를 이행하는 야당 의원들의 행동을 ‘파행’(跛行)으로 몰고, “정상화” 운운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법치를 부정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특히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봐야 할 매체들조차 ‘파행’이니 ‘정상화’니 하는 단어를 함부로 구사한 것은 자괴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야당과 대립관계에 있는 여당의 원내 사령탑이라지만 원유철 원내대표가 무제한 토론 기간 중 ‘국회정상화 촉구 특별기자회견’을 연 것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의 행위를 “기가 막힌 현상들”(삼일절 기념사)이라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무제한 토론은 현행 국회법(102조)에 명시된 합법적이고도 지극히 정상적인 의회 활동의 하나다. 무제한 토론은 재적 3분의1 이상 의원이 서면으로 신청하면 성사된다. 이를 저지하려면 재적 의원 3분의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한 뒤 재적 5분의3 이상의 찬성의결이 있어야 한다. 국회법은 또 무제한 토론 중단 요구서가 접수되더라도 24시간이 지난 다음에라야 표결을 행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무제한 토론이 최소한 24시간 동안 지속되도록 보장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발언은 대정부 질문을 제외하고는 대개 15분 이내로 엄격히 제한된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교섭단체대표 연설(40분 이내) 정도가 있다. 지난달 18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정당 대표 자격으로 연설했지만 원내교섭단체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발언 시간은 15분으로 제한됐다. 정확한 명칭도 ‘연설’이 아닌 ‘발언’이었다. 앞서 새누리당 원유철,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가 각각 40분씩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무제한 토론은 소수당 의원들이 토론이라는 정치활동의 진수를 선보이면서 특정 법안에 대해 반대 논리를 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유권자의 ‘제한된 합리성’ 모델의 이행을 돕는 장치이기도 하다. 특정 법안의 폐기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필리버스터와 달리 길어야 며칠간 법안 처리를 미루며 반대(또는 찬성) 논리를 편 다음 곧바로 표결 처리토록 규정한 우리의 국회법은 절묘하기까지 하다.

단서 조항이 있다지만,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가능케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일주일 남짓의 토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나 아슬아슬해지지 않을까?

박해옥 업다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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