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Primula modesta var. fauriae (Franch.) Takeda.
산중의 봄은 더디게 옵니다. 5월 초순 어느덧 도시에선 초여름의 무더위가 느껴지지만, 높고 깊은 산에선 이제 겨우 봄기운이 감돌 정도입니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해발 2,744m의 백두산을 비롯해 2,000m를 넘는 산들이 북한 땅엔 제법 있지만, 남한에선 이보다 더 높은 산이 없습니다. 남한 제일의 고산답게 5월 초의 한라산엔 아직도 겨울과 봄, 초여름 3계절이 공존합니다.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한낮은 도심처럼 뜨겁지만, 구름과 바람이라도 몰려들면 산꼭대기엔 금방 눈비가 내리고 한밤중 깊은 계곡엔 얼음이 업니다. 당연히 봄도 늦게 시작됩니다. 봄꽃들이 저 발아래 평지보다 한발 늦게 피어납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늦게 피어나는 한라산의 봄꽃은 모두가 ‘한 미모’ 합니다. 그중 으뜸은 설앵초입니다. 4월 초·중순 이미 전국 의 산에서 풍성하게 피어나 벌써 지기 시작하는 앵초나, 5월 초부터 역시 전국 곳곳의 깊은 산에서 흔히 마주치기 시작하는 큰앵초와 달리 한라산을 포함해 가야산과 신불산 등 남녘의 몇몇 고산에서나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한라산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1.600m 이상 올라서야 보랏빛이 감도는 홍자색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도도하기 그지없는 ‘한라산의 요정’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말 한라산 해발 1.600m의 ‘선작지왓’ 평원에서 막 피어난 설앵초 몇 송이를 보았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눈이 녹아 고인 작은 물웅덩이 옆에 핀 설앵초를 보니 왜 ‘눈 설(雪)’ 자가 이름의 앞자리를 차지했는지 절로 알 것 같더군요. 물론 앵초나 큰앵초에 비해 전초나 꽃이 작고 여리기 때문에 ‘어리다, 부족하다, 작다…’는 의미의 설앵초라 불린다는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
또 이파리 뒷면에 눈을 연상케 하는 은황색 가루가 붙어 있어 설앵초란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늦게 피는 대신, 꽃이 지고 사라지는 것도 더뎌 늦게는 6월 하순까지도 선작지왓~윗세오름~남벽 등산로 주변에서 설앵초가 팔랑개비 모양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