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당과의 여러해살이 기생식물, 학명은 Orobanche filicicola Nakai
무성한 연두색 풀 사이에 청보라색 꽃 방망이가 불쑥 솟아나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풀 속을 헤집어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수직으로 선 길이 10~30cm의 황갈색 꽃대에 청보라색 통꽃 10~30개가 이삭 형태로 다닥다닥 달렸습니다. 통 모양의 꽃은 입술처럼 위아래로 갈라지는데 윗입술은 청보라색, 아랫입술엔 흰색이 넓게 번져있습니다. 수술은 4개이고, 1개인 암술머리는 2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10여 개 이상 무리를 지은 꽃대는 녹색의 이파리들에 둘러싸여 있어 사진으로 담자니 어지럽습니다. 순간 꽃대를 둘러싼 무성한 풀들을 정리하고픈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동작 그만. 거기서 멈춰야만 합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백양더부살이가 생명을 부지하고 종족 보존을 위해 화려하고 기기묘묘한 꽃을 풍성하게 피워낼 수 있도록 영양분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조력자 쑥을 제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북 백양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백양’이란 앞머리가 붙었고, 쑥 뿌리에 자신의 뿌리를 박고 기생하는 식물이어서 ‘더부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백양더부살이.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1928년 백양사 근처에서 단 하나의 표본을 채집해 도쿄대학 식물표본관에 보관하였으나, 이례적으로 학계에 공식 발표하는 절차를 밟지는 않았습니다. 관찰할 수 있었던 표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는 게 현 소장의 설명. 그러나 이후 오랫동안 관찰도, 연구도 이뤄지지 않아 아예 절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낳았던 백양더부살이가 70여 년이 지난 2000년에 첫 발견지인 백양사에 멀지 않은 정읍의 한 천변에서 수백 포기가 청보라색 꽃을 피운 모습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을 확인한 현 소장 등이 미국에서 발행되는 식물 연구 잡지인 ‘노본(Novon)’에 새로운 종의 한국 특산식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 후 전남 강진과 신안, 경남 통영, 제주도 등 4~5곳서 추가로 자생지가 확인되었지만, 여전히 개체 수가 많지 않고 확인된 자생지의 훼손 가능성이 우려돼 2012년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백양더부살이의 첫 재발견지인 정읍의 천변 갓길과 둑 비탈은 도로공사와 외래종 식물 화단의 조성 등으로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백양더부살이의 기주식물인 쑥이 가로수 조성공사 등으로 대거 사라지면서 백양더부살이도 덩달아 생존의 기반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4~5월 꽃을 피우는 백양더부살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더부살이 생을 산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식물이지만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성이 인정된, 귀중한 식물자원입니다. 유사한 식물로서 초종용이 있는데, 앞서 설명한 대로 백양더부살이는 쑥에, 초종용은 바닷가의 사철쑥에 기생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