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죽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Tranchomitum lancifolium (Russanov) Pobed.
당신의 마음속 봄은 무슨 색일까요?
눈 내리는 겨울은 하양, 파도가 넘실대는 여름은 파랑, 울긋불긋 단풍 드는 가을은 빨강, 그렇다면 봄은 빨주노초파남보 중 무엇일까요? 그때그때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가는 대중들이 자신도 모르게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특정한 이미지에 빠져들게 하곤 합니다. 가령 “봄바람 휘날리며/ 흩어지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를 부르며 찬란한 봄을 보내는 요즘의 세대들은 나이 든 훗날에도 흩어지는 벚꽃 색으로 봄을 기억할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50, 60대 이상 세대들은 아마 연분홍색으로 봄을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며 “봄날은 간다.”고 그토록 아쉬워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미자의 ‘아씨’를 들으며 옛 어머니들의 고달픈 삶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으니 그들의 봄은 정녕 연분홍색일 것입니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 있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6월 중순, 더위는 벌써 한여름을 방불케 하지만 서해 들녘에 넘실대는 개정향풀의 연분홍 꽃물결을 보노라면 이미 스러진 지 오래인 ‘복사꽃 꼽게 핀 봄날’이 되살아납니다. 연분홍 치마 흩날리며 가시밭길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이 꽃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환영을 봅니다. 덧없이 가버린 봄날의 환희와 고달팠던 삶을 동시에 기억하게 하는 꽃이 바로 6월의 개정향풀입니다. 해서 ‘연분홍 청춘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치는 이들에게는 서·남해 바닷가로 가서 들녘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개정향풀을 만나보라 권합니다. 개정향풀은 크게는 어른 키만큼 자라며 나팔 모양의 손톱만 한 연분홍 꽃이 고깔 형태로 다닥다닥 달리는데, 많은 개체가 무리 지어 자생합니다. 10여 년 전 개정향풀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 일본인 학자가 표본을 남긴 이후 잊혔다가 민간 환경단체 회원들에 의해 90여 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지요. 이후 서·남해안 여러 곳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저 홀로 피고 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요.
그렇듯 큰 키에 비해 꽃은 자잘하기에, 잘 살피지 않으면 개정향풀 꽃의 진가를 알아채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름 앞에 붙은 ‘개’는 큰 키와 꽃 모양이 완도와 대청도 등 서해 섬의 산기슭에 자생하는, 같은 협죽도과의 정향풀을 닮은 식물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예 갯정향풀로 불린다고 하는 걸 보면 얕잡아 부르는 개(犬)가 아니라, ‘갯가’ 식물이라는 뜻의 ‘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꽃 색은 정향풀은 하늘색, 개정향풀은 연분홍색입니다. 작약이나 투구꽃처럼 오각형 뿔 모양의 씨방이 농익으면 터져 씨가 여기저기로 날려 번식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