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과의 여러해살이 부생식물, 학명은 Cymbidium macrorrhizum Lindl.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문득 이육사의 시 <광야>의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치고 지나갑니다. 필자뿐 아니라 아마 야생화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느닷없이 순백의 꽃과 맞닥뜨릴 순간 부지불식중에 떠올리는 시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꽃 찾아 산과 계곡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흰 얼레지, 흰 앵초, 흰 솔나리, 흰 애기송이풀, 흰 금강초롱, 흰 금낭화, 흰 두메자운 등등 붉거나 노랗거나 파란 본연의 꽃 색과는 확연히 다른, 색소 부족의 병이라도 걸린 듯, 또는 아예 변종으로 진화한 듯 온통 흰색으로 물든 꽃들을 간혹 만나곤 합니다. 지난 14일에도 마치 ‘백마’인 듯, 아니 ‘백마 탄 초인’인 듯싶은 하얀 꽃을 보았습니다. 희귀한 순백의 꽃이 아니더라도, 본연의 꽃 자체가 이미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 식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대흥란입니다.
지난 6월 중순 이후 한 달여 간 백두산의 고산식물에 푹 빠졌다가 모처럼 길을 나섰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 날씨를 감안해 행선지를 특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오전 7시 현재 홍천은 흐리고, 동해는 12시 이후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솔나리와 풍경을 함께 담으려 산에 오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다소 흐리더라도 접사 사진에는 큰 지장이 없을 삼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대관령 인근부터 세차게 비가 오더니 오전 내내 이어집니다. 모처럼 꽃은 좋은데 날씨가 안 받쳐주니, 장대비와 씨름하며 대흥란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전남 해남의 사찰 ‘대흥사’에서 처음 발견돼 그 이름을 얻은 대흥란. 녹색의 잎이 없어 식물의 기본적인 생명 활동인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썩은 나무의 분해물 따위에서 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부생(腐生)식물입니다. 다만 어느 정도 자라면 줄기와 열매가 녹색으로 변하면서 광합성도 하는 불완전 부생식물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보입니다. 7~8월 10~30cm의 줄기 끝에 통상 흰색 바탕에 붉은색 줄과 반점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2~6개의 꽃이 드문드문 달리는데, 간혹 순백의 꽃이 피기도 합니다. 길고 끝이 뾰족한 3장의 꽃받침잎, 그보다 다소 짧은 긴 타원형 꽃잎 2장, 뒤로 젖혀지며 끝이 3갈래로 얇게 갈라지는 순판으로 이뤄진 꽃의 전체 크기는 3~4cm로 비교적 큰 편입니다. 때문에 자생지라 해도 꽃이 피기 전에는 대흥란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일단 꽃이 피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대흥란의 북방한계선이랄 수 있는 강원도 삼척을 비롯해 충남 이하 남부 지역과 제주도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생지가 사람들이 사는 저지대라서 각종 개발에 따른 훼손이 우려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실제 강원도 삼척 자생지의 경우 ‘개울 주변의 습기가 많은 숲 가장자리에 서식한다.’는 설명대로 바로 10m 앞에 오십천이 흐르고 인가가 있는 큰길가인데 다행히 보호 철책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국외에선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네팔 미얀마 대만 태국 베트남 등지에 분포합니다. 일본에도 자생하는데 개체 수가 200개 미만이어서 위협종(EN)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