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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 백 년만에 한 번 보는 꽃, 가시연꽃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6.09.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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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의 한해살이 수초. 학명은 Euryale ferox Salisb.

참으로 여러 번 보는 이를 놀라게 하는 식물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큰 이파리에 놀랍니다.

누구나 첫 대면 때에는 물 위에 떠 있는 동그란 이파리부터 보게 되는데, 그 이파리가 마치 연못을 가득 메우기라도 할 듯 널찍합니다. 작은 것은 지름이 20cm 안팎에 불과하지만 큰 것은 무려 2m에 달하니 우리나라 식물 중 가장 큰 잎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시가 촘촘한 이파리 한가운데를 뚫고 올라온 가시연꽃의 꽃송이가 파란 하늘과 무성한 연잎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보랏빛 꽃잎을 열고 서 있다.

두 번째는 이파리는 물론 줄기와 뿌리, 그리고 꽃받침 등 전초에 얼핏 보아도 확연히 눈에 들어올 만큼 많은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는 것에 놀랍니다. 보통 한 포기에 10개 정도 달리는 밤톨 같은 열매에도 밤송이처럼 가시가 송송 나 있는데, 가시 없는 부위는 열매 속에 가득 찬 완두콩 모양의 씨앗과 보랏빛 꽃잎 둘뿐입니다.

특히 찌를 듯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힌 창 모양의 봉우리가 역시 가시투성이의 두꺼운 진녹색 이파리 한가운데를 뚫고 올라와 보랏빛 꽃잎을 반쯤 열어젖힌 모습은 한마디로 ‘경이롭다’고 할 정도입니다.

 
지름 4cm 안팎의 꽃. 꽃받침은 4조각이며 끝이 날카롭다. 수술은 많아서 8겹으로 돌려난다.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해도 수온과 수심, 기후와 일조량 등이 맞아야 열리기 때문에 활짝 핀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수백 년 전 씨앗에서 싹이 텄느니, 백 년 만에 꽃이 피었느니 하는 이적(異蹟)의 이야기들도 위에 열거한 것들에 못지않게 듣는 이를 놀라게 합니다.

바로 가시연꽃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뿌리는 물밑 땅속에 내리고, 잎은 수면에 띄우고 살아가는 부엽(浮葉)식물인 가시연꽃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면서 알게 되는 사실들입니다.

 

검붉은 보라색 잎 아래에 가시연꽃의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개화에 적정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이파리가 뒤집혀 검붉은 뒷면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먼저 가시연꽃의 넓은 이파리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도 굵은 줄기 등 전초가 불과 한두 달 만에 자란 결과라는 점입니다. 때가 되면 씨앗만 남긴 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전형적인 한해살이 수초이기 때문입니다. 발아된 씨앗에서 처음 나온 화살 모양의 작은 잎이 최대 지름 2m의 넓고 둥근 잎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하루에 무려 20cm씩 자라기도 한다니 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잎이 크고 꽃 색이 진한 보라색인 통상적인 가시연꽃과 달리,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잎과 꽃이 작고 꽃 색도 연한 분홍색을 띠는 것도 아주 드물게 눈에 띈다. 가시연꽃의 꽃은 보통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생성한다.

수십 년 만에 싹을 틔우고 백 년 만에 꽃을 피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바로 한해살이풀의 특성에 기인합니다. 뿌리도 줄기도 이파리도 사그라지고 남은 것은 씨앗이 유일한데, 그 씨앗은 쉽게 발아하지도 않고 또 쉽게 썩지도 않는 신비의 생명체입니다. 즉 가시연꽃의 씨앗은 한두 해 안에 발아가 안 되면 물속에서 그대로 썩어버리는 다른 식물의 씨앗과 달리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한 채 땅속에서 쉬고 있는 매토종자(埋土種子)입니다. 휴면 상태에서 때를 기다리던 씨앗은 수압과 수온, 기후 등이 최적의 조건이 되면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고 꽃을 피웁니다. 바로 가시연꽃이 보여주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중부 이남의 주로 오래된 연못에서 자생하는 가시연꽃. 이름과 달리 꽃핀 풍광이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실제 수년 전 강원도 경포호에서 50년 만에 가시연꽃이 등장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2010년 경포호 배후 습지에서 난데없이 가시연꽃이 개화한 연원을 추적한즉슨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매토종자가 습지 복원사업으로 생육조건이 맞자 반세기 만에 다시 발아를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발아만 까다로운 게 아니고 꽃을 피우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예민해서 수온과 수심, 기후, 일조량 등이 맞지 않으면 아예 꽃을 피우지 않고 그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꽃을 피우지 않고도 자가수분을 통해 종자를 만들 수 있는 폐쇄화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때문에 ‘백 년 만에 피는 꽃’이라거나, ‘백 년 만에 한 번 볼 수 있을 만큼 보기 어려운 꽃’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대에게 행운을’이라는 꽃말을 가진 가시연꽃의 꽃을 지난여름의 불볕더위가 남긴 축복인양 지난 8월 말 반갑게 만났습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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