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과의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 학명은 Halenia corniculata (L.) Cornaz.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져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살찌도록 분부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씨를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하여 주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에서)
높은 산 정상에서 하늘을 찌를 듯 휘날리는 닻을 보며, 그토록 ‘위대했던’ 여름이 저 멀리 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릴케가 노래했듯, 봄부터 여름까지 힘차게 달려온 긴 여정이 하늘은 높고 볕은 따가운 가을을 맞아 결실을 보고, 곧 닥쳐올 길고 긴 겨울 저마다의 보금자리에서 닻을 내리고 정주(定住)에 들어갈 것임을 꽃들이 먼저 알아차리는 듯합니다. 해서 닻 모양의 꽃을 난데없이 산 정상 구름바다 위에 띄워놓고 이제 하던 일 갈무리하고 긴 휴식에 들어갈 채비를 하라고 일러 주는 듯합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도 가을과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하여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꽃이 바로 닻꽃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게 하는 묘한 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정말로 배가 산에 정박한 것일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있듯이 닻이 산으로 온 까닭은 무엇일까 등등.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청마 유치환의 ‘깃발’에서)
깃발 하나를 보고 이런 시를 남긴 유치환 선생이 온 산에 널린 닻을 보았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꽃의 모양이 배를 멈춰 세울 때 사용하는 닻을 닮았다고 해서 닻꽃으로 불리는데, 실제로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8~9월 햇볕이 잘 드는 고산 풀밭에서 한두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뿌리까지 고사해 사라집니다. 봄철 피는 삼지구엽초도 꽃 모양이 닻을 닮았다고 해서 닻풀로도 불립니다.
과거 남한의 대표적인 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도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도 손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외 강원도 대암산과 한라산에도 자생하는데, 한라산에서는 그 수가 크게 줄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아무튼 남한의 고산에만 일부 자생한다는 건 북쪽을 고향으로 둔 북방계 식물이라는 뜻인데, 실제 지난해 7월 중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 변의 유명 관광지인 자임카 자연휴양림 오솔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있는 닻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분류하고 각별한 관심을 쏟는 닻꽃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피고지고 있었습니다. 동토(凍土)의 시베리아가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한 본향(本鄕)이라는 말을 눈으로 실감한 셈이지요.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