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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게 하는 꽃, 닻꽃!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6.09.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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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과의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 학명은 Halenia corniculata (L.) Cornaz.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져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살찌도록 분부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씨를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하여 주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에서)

 

흰 구름이 머무는 높은 산 정상 바로 아래 풀밭에 피어난 닻꽃.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즈음 피어나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높은 산 정상에서 하늘을 찌를 듯 휘날리는 닻을 보며, 그토록 ‘위대했던’ 여름이 저 멀리 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릴케가 노래했듯, 봄부터 여름까지 힘차게 달려온 긴 여정이 하늘은 높고 볕은 따가운 가을을 맞아 결실을 보고, 곧 닥쳐올 길고 긴 겨울 저마다의 보금자리에서 닻을 내리고 정주(定住)에 들어갈 것임을 꽃들이 먼저 알아차리는 듯합니다. 해서 닻 모양의 꽃을 난데없이 산 정상 구름바다 위에 띄워놓고 이제 하던 일 갈무리하고 긴 휴식에 들어갈 채비를 하라고 일러 주는 듯합니다.

 

꽃 모양이 배를 정박할 때 쓰는 도구인 닻을 똑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는 닻꽃. 실제 보면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한여름 뙤약볕에서도 가을과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하여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꽃이 바로 닻꽃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게 하는 묘한 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정말로 배가 산에 정박한 것일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있듯이 닻이 산으로 온 까닭은 무엇일까 등등.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한 본향으로 불리는 시베리아. 그 시베리아 한복판 바이칼 호수 인근 자임카 자연휴양림에서 2015년 7월 만난 닻꽃. 우리나라보다 한 달 가까이 일찍 핀 때문인지 꽃 등 전초에서 녹색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청마 유치환의 ‘깃발’에서)

 

깃발 하나를 보고 이런 시를 남긴 유치환 선생이 온 산에 널린 닻을 보았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꽃의 모양이 배를 멈춰 세울 때 사용하는 닻을 닮았다고 해서 닻꽃으로 불리는데, 실제로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8~9월 햇볕이 잘 드는 고산 풀밭에서 한두 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뿌리까지 고사해 사라집니다. 봄철 피는 삼지구엽초도 꽃 모양이 닻을 닮았다고 해서 닻풀로도 불립니다.

 

금강초롱꽃과 나란히 피어난 닻꽃. 저 깊은 바다 밑에 들어가 배를 고정하는 데 쓰여야 할 닻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과거 남한의 대표적인 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도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에 비교적 많은 개체가 자생해 수도권에서도 손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외 강원도 대암산과 한라산에도 자생하는데, 한라산에서는 그 수가 크게 줄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아무튼 남한의 고산에만 일부 자생한다는 건 북쪽을 고향으로 둔 북방계 식물이라는 뜻인데, 실제 지난해 7월 중순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하는 안가라 강 변의 유명 관광지인 자임카 자연휴양림 오솔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있는 닻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분류하고 각별한 관심을 쏟는 닻꽃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피고지고 있었습니다. 동토(凍土)의 시베리아가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한 본향(本鄕)이라는 말을 눈으로 실감한 셈이지요.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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