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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 단풍보다 이른, 단풍보다 더 붉은, 꽃무릇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6.09.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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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과 상사화속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Lycoris radiata (L’Her.) Herb.

"털썩, 주저앉아버리고만/

이 무렵//

그래선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안간힘으로 제 몸 활활 태워/

세상, 끝내 살게 하는//

무릇, 꽃은 이래야 한다는/

무릇, 시는 이래야 한다는// (오인태의 ‘꽃무릇’)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둥실 떠가는 초가을, 꽃무릇이 단풍보다 더 빨리, 단풍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마음을 헤아린 탓인지, 단풍보다 더 일찍, 단풍보다 더 붉게 꽃무릇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아니 타오르기 시작한 지는 벌써 오래전, 지난 주말 한창때를 지나더니 이제 석양이 서편 하늘을 더 붉게 물들이듯 황혼의 비장미를 불태우려 합니다.

 
 

하나의 꽃대에 5개에서 많게는 10개까지 진홍색 꽃송이가 달리며, 꽃송이마다 역시 6개의 진홍색 꽃잎과 수술 6개, 암술 1개가 길게 뻗어 나온 꽃무릇.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돌마늘이라는 뜻의 정명 석산(石蒜)보다 꽃무릇이라는 우리말 이명이 더 친숙한 꽃. 그 또한 본래는 야생화였겠지만, 지금 우리가 흔히 만나는 것은 일부러 가꾼 조경용, 원예종 꽃입니다. 그렇게 가꾼 원예용 꽃밭 가운데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3대 군락지는 전남 영광 불갑사와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 등으로 모두가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꽃무릇의 알뿌리에 방부제 효능이 있어 경전을 묶거나 단청이나 탱화를 그릴 때 즙을 내 풀에 섞어 바르면 좀이 슬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예로부터 사찰에서 일부러 심어 활용했다고 합니다. 꽃무릇보다 이른 시기인 6~7월 연분홍 꽃을 피우는 상사화가 그 비늘줄기로 풀을 쑤면 경전을 단단하게 엮을 수 있다고 해서 사찰에서 많이 심어 가꿔왔다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여겨집니다.

 

다리 건너 저편은 피안(彼岸)의 세계인가. 전남 영광 불갑사 일주문을 들어서자 검은색 돌담과 작은 구름다리 사이에 꽃무릇이 한 무더기 피어 찾는 이를 반긴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즉 서로 다른 시기에 피고 나서 만나지 못하기에 꽃과 잎이 서로를 애타게 그리는 꽃이라는 뜻에서 일부에서 꽃무릇을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으로 혼용해 부르지만, 정명 상사화와는 다른 식물입니다. 일본 원산의 상사화는 봄에 난 잎이 진 뒤인 6~7월 꽃이 피지만, 중국 원산의 꽃무릇은 8~9월 진홍색 꽃이 지고 난 뒤 잎이 나와 월동을 한 뒤 이듬해 봄에 스러집니다.

그런데 지난 20일 꽃무릇을 보러 불갑사도 용천사도 선운사도 아닌, 경남 함양을 다녀왔습니다. 무릇, ‘오인태의 꽃무릇’을 인용하려거든 시인의 고향에 가서 꽃무릇을 만나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신라 말 당시 천령군 태수로 있던 고운 최치원이 홍수 예방을 위해 둑을 쌓고 물길을 새로 내면서 조성했다는 상림공원에 규모 면에서는 3대 군락지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멋진 꽃무릇 꽃밭이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으로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상림에는 길이 1.6km 물길을 따라 피어난 꽃무릇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운치 있는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무릇, 시인이 보았을, 제 몸 활활 태우며 빨갛게 빨갛게 물든 ‘천 년의 숲’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천 년의 숲’ 경남 함양의 상림공원에서는 신라 말 홍수 예방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했다는 길이 1.6km 물길을 따라 꽃무릇이 피어 곳곳마다 멋진 수채화를 그려낸다.

흔히 진달래꽃을 보고 ‘핏빛 같은’ 꽃 색이라 일컫습니다. 피를 토할 때까지 운다는 두견새에 빗대 두견화(杜鵑花)란 별칭으로도 불려왔습니다. 그런데 눈 가는 데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석산, 꽃무릇의 벌판을 보고는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명사로 진달래가 아니라 꽃무릇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생화든 원예종이든, 조경화이든 유서 깊은 산사나 천 년의 숲과 어우러진 광경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뇌리에 남습니다. 참 충남 보령시 성주산 자연휴양림에도 꽃무릇 수십만 송이가 진홍색 꽃망울을 터뜨리며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저 흘려보내고 후회하지 말고 이제라도 길 떠나보시라 권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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