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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야생화 기행]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의 유혹, 둥근잎꿩의비름!

  • Editor. 김인철
  • 입력 2016.10.1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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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 Hylotelephium ussuriense (Kom.) H. Ohba.

간밤 천둥·번개가 내리쳤어도 다음 날 아침 찾아가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듯, 꽃들은 환하게 피어납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요동쳐도 봄은 가고 여름이 오듯,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 없어도 꽃은 피고 낙엽은 집니다. 그렇지만 무심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결코 야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갖 천재지변과 이상 기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철과 때를 잊지 않고 주어진 의무, 꽃 피우고 열매 맺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꽃들에서 자연의 엄정함을 배웁니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은 적 없는 듯, 커다란 바위 위에 이끼가 두껍게 깔려있고 맑은 물이 바위를 감도는 깊은 계곡에 둥근잎꿩의비름이 풍성하게 피어있다.

지난여름 너나 할 것 없이 불볕더위로 고통을 겪는 가운데, 영남 지역은 섭씨 40도를 넘는 도시가 있을 만큼 유별나게 더웠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지진과 태풍이라는 유례없는 기상재해로 지역 주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더위와 지진, 태풍이라는 3대 기상재해에도 불구하고 유독 영남 지역의 산과 계곡에서만 자라는 가을 야생화가 그야말로 무심히 피어나,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 숲을 배경으로 둥근잎꿩의비름의 홍자색 꽃송이가 하늘에 매달려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다.

바로 둥근잎꿩의비름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꽃입니다. 마주 보는 잎이 달걀이나 타원처럼 둥글어서 ‘둥근잎’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꿩의비름 속 식물의 하나입니다. 꿩의비름 속 식물은 세계적으로 33종, 우리나라에는 둥근잎꿩의비름을 비롯해 꿩의비름, 키큰꿩의비름, 큰꿩의비름, 자주꿩의비름, 세잎꿩의비름, 섬꿩의비름, 새끼꿩의비름 등 모두 8종이 자라고 있습니다. 꽃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늘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래도 꿩의비름 속 중 최고는 둥근잎꿩의비름이라고 나도 모르게 실토합니다. 자생지가 우리나라에서도 주왕산과 팔각산 등 경북 청송과 영덕 일대 계곡에 국한돼 있어 한동안 한국의 고유종, 특산식물로 분류됐지만 최근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두만강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바위틈에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30cm 안팎의 줄기를 여러 가닥 늘어뜨린 둥근잎꿩의비름. 마주 보기로 난 원형의 잎이 홍자색 꽃 못지않게 매혹적이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나, 산비탈 자잘밭의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30cm 안팎의 줄기를 여러 가닥 늘어뜨리는데, 줄기마다 둥근 잎이 많으면 10장도 넘게 마주 보고 달립니다. 물기가 거의 없는 바위 절벽에 붙어사는 식물들이 거개 그렇듯 둥근잎꿩의비름 역시 전초가 다육질인데, 둥글고 도톰한 녹색의 잎이 햇살이라도 받으면 투명한 연두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게 꽃 못지않게 매혹적입니다. 식물 정명의 앞머리에 ‘둥근잎’이 붙은 게 공연한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9월에서 10월 사이 줄기 끝에 우산 형태로 홍자색 꽃이 빽빽하게 달리는데, 절벽 아래 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시시각각 해가 드는 방향이 바뀌는 깊은 계곡은 어느 순간 연두색이었다가 금방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며 둥근잎꿩의비름의 멋진 배경이 된다.

 해서 깊어가는 가을, 통곡하고 싶은 가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불면의 고통을 겪는 이가 있다면 주저 말고 청송으로 가서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의 유혹’, 둥근잎꿩의비름의 붉은 색 꽃을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사통팔달 고속도로가 뚫린 요즘에도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왕복 2차선 지방도 등을 한 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오지.

 
가을날 집채만 한 바위 위에,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바위 틈새에 마치 접착제로 붙여 놓은 듯 붙어사는 둥근잎꿩의비름.

하지만 구불구불한 도로변에 줄지어 늘어선 과수원, 과수원마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사과 향을 맡아보고, 또 주왕산 천길 바위 절벽 곳곳에서 진홍색으로 피어나는 둥근잎꿩의비름과 눈 맞춤하는 사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오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야생화 한 송이가 마음의 가난을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의 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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