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춘삼월(春三月)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이 붑니다. 그 옛날 노총각 호밋자루 내던지고 콧노래 흥얼거리게 했던 봄바람이 붑니다. 앵두나무 우물에서 물 긷던 동네 처녀 물동이 내던지고 산으로 들로 내닫게 했던 봄바람이 붑니다. 그 봄바람 따라 산과 들의 풀, 나무들도 엉덩이 들썩이며 덩달아 바람이 납니다. 가장 먼저 봄바람을 탄 건 바로 바람꽃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변산바람꽃(학명 Eranthis byunsanensis B.Y.Sun)이 일등입니다. 이미 보름여 전인 2월 중순 ‘변산바람꽃’이란 이름을 낳은 전북 부안군 내변산 일대에서 하나둘 피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전남 여수에서는 돌산섬 앞 밤바다를 하얗게 밝힐 듯 우르르 피어납니다. 서해안에서만 피는 게 아니고 울산 황토전 등 동해안 일대와 충남 배재산, 경기 수리산, 강원 설악산 등 전국에서 꽃바람을 일으킵니다.
변산바람꽃이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이고 지나간 뒤인 3월 초순 좀 더 높고 깊은 산 계곡에서는 너도바람꽃(학명 Eranthis stellata Maxim.)이 얼음장 같은 땅을 비집고 가냘픈 꽃대를 밀어 올리며 생명의 신비를 전파합니다. 제주도를 빼고 전국적으로 폭넓게 분포합니다. 때문에 개나리와 진달래를 뛰어넘어 여타 산꽃들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이들이 비교적 초창기에 손쉽게 접하면서, 야생화의 세계에 눈을 뜨고 야생화의 신비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는 꽃이기도 합니다. 하나둘 피던 너도바람꽃이 어느새 계곡과 산비탈에 가득 찼다고 느껴지면 이미 봄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아무리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도 한갓 허사(虛辭)일 뿐 꿩의바람꽃과 회리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만주바람꽃, 들바람꽃, 숲바람꽃, 세바람꽃, 나도바람꽃 등 우리 땅에서 피고 지는 수많은 종류의 바람꽃이 한꺼번에, 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면서 봄날의 환희를 노래하게 됩니다.
특히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라면 4~5월 피는 나도바람꽃(학명 Enemion raddeanum Regel)은 봄의 완성을 알리는 ‘순백의 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강원 이북의 산지에서 피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나도바람꽃은 키 10~20cm 안팎인 여타 바람꽃에 비해 30cm 이상으로 자라는 장신인 데다, 크고 선명한 이파리에 순백의 꽃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신록의 숲 가운데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식물명에 붙은 ‘너도’나 ‘나도’라는 접두어는 전혀 다른 분류군에 속하지만, 꽃이나 이파리 등 생김새가 비슷한 식물에 붙는 경우가 많은데 너도바람꽃이나 나도바람꽃도 결국 꽃 모양 등 생김새가 바람꽃의 기본종인 바람꽃(학명 Anemone narcissiflora L.)을 닮은 데서 유래합니다. 다른 많은 바람꽃과 달리, 아무런 접두어 없이 단지 바람꽃으로 불리는 꽃, 봄이 아닌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는 7~8월에 피는 꽃, 한라산을 제외하고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설악산에서, 그것도 산비탈이나 골짜기 등 저지대에 피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대청봉 꼭대기에서 피는 꽃이 바로 바람꽃입니다. 한여름 서너 시간 비 오듯 땀을 흘린 뒤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서 멀리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눈처럼 하얗게 핀 바람꽃을 마주해야만 한여름 피는 이 꽃을 왜 ‘바람꽃’의 기본종으로 꼽는지 알게 됩니다.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