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름나물과의 여러해살이 수초. 학명은 Menyanthes trifoliata L.
강원도 태백의 첩첩산중에 있는 작은 못을 찾아가던 지난 5월 2일. 서울 인근에선 이미 진 산 벚꽃이 뭉게구름처럼 이 산 저 산 중턱에 걸려있고, 태백시로 접어드는 도로의 벚나무 가로수에도 아직 하얀 꽃이 남아있어 서울과의 지리적, 그리고 시간적 거리를 실감케 합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고 돌아 길을 재촉하자 낙동강과 한강, 그리고 오십천의 발원지임을 알리는 삼수령(三水嶺)이란 이정표가 나옵니다. 얼마간 더 나가자 고려 말 삼척으로 유배 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며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어놓고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고개 건의령(巾衣嶺)이 앞을 막아섭니다. 차를 멈춰 세우고 주변을 살피자 첩첩으로 둘린 산 중턱에 놀랍게도 200평 남짓한 물웅덩이가 보이고, 그 한가운데 밝고 하얀 꽃을 한 아름 달고선 조름나물 군락이 눈에 들어옵니다.
조름나물은 세계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북아메리카 등 북반구의 고위도 습지에서 자라는 정수성(淨水性) 수생식물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몽골, 러시아, 네팔, 카슈미르 등지에 분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생지는 평북과 함경도 등 북한 지역을 제외하면, 강원도 대암산 용늪과 고성의 석호(潟湖) 2곳, 태백의 못, 그리고 경북 울진의 연호 등 몇몇 습지에 국한되어 있어 환경부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옛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수채(睡菜)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것으로 미뤄 ‘잘 수(睡), 나물 채(菜)’란 한자 이름이 ‘졸음나물’이란 우리말로 불리다가 이것이 지금의 조름나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애초 수채란 이름은, 뿌리든 잎이든 사람이나 동물이 먹으면 잠이 온다는 데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쭉 뻗은 줄기 끝에 3장의 잎이 둘러 나며 키 20~35cm까지 자라는데, 종소명 트리포리아타(trifoliata)는 바로 ‘3장의 작은 잎이 달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꽃은 긴 꽃자루 끝에 여러 개가 층층이 달리는, 총상화서(總狀花序)로 핍니다. 개개의 꽃은 희고 긴 털이 촘촘히 난 5개의 꽃부리로 갈라지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그 모습은 순백의 눈 결정체를 똑 닮았습니다.
강원도 태백의 깊은 산중에서 조름나물의 자생지가 처음 발견된 것은 5년 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총 길이 1,400km인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바로 전형적인 북방계 습지식물이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가깝게는 1만 년 전부터 멀게는 수억 년 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빙하기 때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의 북방계 식물들이 백두대간을 타고 제주도까지 내려왔다가 이후 기온이 오르면서 대부분 절멸해가는 가운데 일부가 백두대간 내 오지에 근근이 연명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6년 6월 14일과 15일 백두산 인근 습지 2곳에서 잇따라 조름나물을 만났습니다. 백두산 일대가 조름나물 등 한반도 희귀 북방계 식물의 고향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지요. 그리고 백두산과 강원도 태백 사이에 약 900km의 거리적 차이가 있다면, 두 곳의 시간적 차이는 1달 반 정도에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4월 중순에서 5월 초 강원도 태백서 피는 조름나물이 백두산에서는 6월 중순에야 만개하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속 100km로 달려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같은 꽃이 피는 데는 40여 일이란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글 사진: 김인철 야생화 사진작가(전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