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지훈의 이야기力] 패러다임의 전환 첫 번째, 인플레이션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10.19 0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인플레이션

인플레이션은 통화 가치가 하락하며 물가 전반이 지속해서 상승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현대 들어와 세계 각국이 구축한 경제구조의 근간을 이룬다.

현대 경제는 한 국가의 경제가 일시적으론 부침을 겪을 순 있어도 끊임없이 확대 성장할 것이라고 가정해왔다. 사실 이는 가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신념, 또는 신앙에 가깝다. 경기가 지난해 혹은 지난 분기보다 위축되는 건 정부에게도, 기업과 일반 시민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에게는 정책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고, 기업과 시민에게는 본인의 수익이 감소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물가 전반이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커녕 물가상승 둔화 낌새만 보이더라도, 이를 경기침체의 전조로 여기고 발작적으로 반응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점차 규모가 커지는 경제를 원활히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혹은 기대만큼 커지지 않는 경제를 억지로라도 키우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통화를 발행해야 한다. 더 많은 통화를 발행해 순환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신용을 키워 경제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통화 가치를 하락시키고, 그만큼 재화와 서비스 가격을 상승시킨다. 특히 실물 경제에서의 수요는 많지 않은데 억지로 성장률을 키우기 위해 통화를 늘리는 경우 이런 현상이 심화한다.

인플레이션은 통화 가치가 하락하며 물가 전반이 지속해서 상승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현대 들어와 세계 각국이 구축한 경제구조의 근간을 이룬다. [사진출처=언스플래시]
인플레이션은 통화 가치가 하락하며 물가 전반이 지속해서 상승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현대 들어와 세계 각국이 구축한 경제구조의 근간을 이룬다. [사진출처=언스플래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당시 전 세계적으로 풀린 막대한 통화량과 그 이후 진행된 물가상승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지금이야 각국이 겪는 고물가를 올해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탓으로만 돌리는 모양새나, 사실 세계 주요국 물가는 이미 지난해 중순부터 각국의 물가목표치를 넘어섰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아 각국이 취한 봉쇄조치와 그로 인한 공급망 차질이 물가상승 압박으로 작용했고, 시중에 풀린 막대한 통화량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위시해 현재 세계 각국 중앙은행은 ‘적절한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을 통화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은행법 제1조 제1항에서 “이 법은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6조 제1항에서 “한국은행은 정부와 협의해 물가안정목표를 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제3항에서 “한국은행은 제1항에 따른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이러한 법령에 근거, 한국은행은 2019년 이후 중기적인 시각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전년 동기 대비 2%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통화정책을 운용해왔다. 다시 말해 물가를 매년 조금씩이나마 올리는 게 한국은행의 최우선 목표란 얘기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별다른 중간 목표 없이 중기적으로 달성해야 할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미리 제시하고, 이에 맞춰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체제를 가리켜 ‘물가안정목표제’라 한다. 이는 비단 한국은행만의 특징이 아니며, 1990년 뉴질랜드가 최초로 도입한 이래 캐나다(1991), 영국(1992), 스웨덴(1993) 등 세계 주요국들이 차례로 채택해온 방식이다. 미국 연준 역시 현재 개인소비지출(PCE) 지수의 연간 상승률을 2%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물가안정목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 선진국은 2%대, 신흥국은 그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설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이전까지 중앙은행들은 통화량, 환율 등을 중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조절함으로써 물가안정이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하는 중간목표관리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해왔다. 그러나 점차 통화수요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통화와 인플레이션 간의 관계가 불명확해지면서 중간 목표로서 통화량 조절의 유용성이 크게 저하됐고, 환율 역시 여러 국가가 변동환율제로 전환함에 따라 특정 환율을 목표로 삼고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물가목표안정제의 도입에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적절한 인플레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했던 영향이 컸다. 각국 중앙은행이 2% 수준의 물가상승률을 유지하기로 한 것은 물가가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올라준다면 사람들이 소비나 투자를 먼 미래로 유예하는 대신 각자의 계획에 따라 소비와 투자를 진행하고, 이것이 경기침체를 막고 경제에 안정과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 믿음 아래 각국 중앙은행은 지난 수십 년간 통화정책을 운용해왔고, 이는 점차 현대 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강력한 패러다임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오랜 패러다임에 금이 가는 모양새다. 현재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제 기능을 못 한 지 이미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G20 국가 중 최근 물가상승률이 2~3%대를 기록한 국가는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스위스 4개국뿐이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5.6%를 기록했고, 그마저도 7월 6.3%에서 감소한 것이었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6월 9.1%로 정점을 찍은 뒤 다소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지난달 8.2%를 기록했다. PCE 지수 역시 지난 8월 전년 동기 대비 6.2% 상승하며, 연준의 물가안정목표치를 한참이나 웃돌았다.

영국은 8월 9.9%, 유로존은 9월 10%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고, 네덜란드의 물가상승률은 지난달 14.5%까지 치솟았다. 현재 우리나라도 고물가에 생활고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이들 국가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는 물가상승률이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지난달 10%를 기록한 독일의 경우에는 심지어 70년 만에 처음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물가 고공행진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연준을 중심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늘린 통화량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각국 정부는 코로나19로 실물 경제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긴급 지원금 형태로 시중에 막대한 양의 통화를 공급했는데, 그 양이 전례 없는 규모였던 만큼 이는 그 자체로 물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준은 올해 3월부터 시작한 금리 인상에 더해 지난 6월부터는 양적긴축을 실시하며 그동안 시중에 푼 유동성을 회수 중이다. 양적긴축이란 코로나 팬데믹 시기 시행했던 양적완화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후자가 중앙은행이 직접 국채 등을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만기가 도래한 보유자산에 대해 재투자를 중단하거나 만기가 남았더라도 보유자산을 시장에 매각함으로써 중앙은행이 시중 통화량을 흡수하는 것을 말한다.

2020년 미국 연준이 푼 통화량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이 푼 통화량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 연준이 늘린 자산 규모(오른쪽 빨간원)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의 자산 규모 증가분(왼쪽 빨간원)보다 훨씬 크다. 현재 연준은 양적긴축을 통해 그동안 시중에 푼 막대한 유동성을 회수 중이다(파란원). [사진=연방준비제도 제공]

그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상 자산과 부채가 늘어나거나(양적완화) 줄어들게 되는데(양적긴축), 이처럼 중앙은행이 대차대조표상 자산과 부채를 조절해 시중 유동성을 조절한다고 해서 양적완화와 양적긴축을 ‘대차대조표 정책’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대차대조표 정책은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조정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수단으로 훨씬 적극적인 시장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연준이 대차대조표 정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다. 연준은 금융위기가 닥치자 2008년부터 2013년까지 3차례에 걸쳐 양적완화 정책을 펼쳤으며, 이 기간 연준의 자산은 2조달러 넘게 증가했다. 이로 인해 경기가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세를 보이자 2014년에는 자산매입은 지속하되 그 규모를 줄여가는 ‘테이퍼링’을 실시했고, 2017년부터는 재투자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양적긴축을 실시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자 같은 해 3월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하며,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금융시장이 필요로 하는 만큼 매입하겠다는 사상 초유의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 결과 연준의 자산규모는 2020년 3월 4조3000억달러에서 양적긴축을 시작하기 직전인 지난 5월 말 8조9000억달러까지 2배 넘게 불어났다. 2년여 만에 4조6000억달러가 증가한 셈인데, 이로 인해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유동성 회수를 위해 연준이 지난 6월부터 양적긴축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의 양적긴축은 2017년 시행했던 양적긴축과는 차이가 있다. 2017년 양적긴축은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끝낸 다음 시행했던 것인 반면, 현재의 양적긴축은 기준금리 인상과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현재 연준이 느끼는 물가 위험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과 물가안정목표 실현에 대한 연준의 시급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다만 연준은 고강도 긴축으로 경제와 금융시스템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양적긴축을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해간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만기 미도래 자산을 직접 매각하기보다는 만기가 도래하는 자산에 대한 재투자를 중단함으로써 대차대조표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줄여가겠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선 연준의 긴축정책이 물가를 안정화하면서 경제도 연착륙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반적으로 경기침체 전조 현상으로 알려진 미 국채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올해 7월 이후 심화하고 있고, 금리 인상과 양적긴축을 동시에 진행하는 고강도 긴축정책이 성장과 고용에 큰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도 확산하고 있는 탓이다.

아직 미국 내 고용지표가 견고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고 실업률도 낮은 상황이지만, 향후 강도 높은 긴축이 이어질 경우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예단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재의 물가 고공행진이 지정학적 이슈 등 공급 측 요인에서 기인한 부분도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통화량만 통제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이쯤에서 자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들은 그동안 고수해온 ‘적절한 인플레이션’ 정책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치솟았던 물가는 머잖아 낮은 수준으로 내려오고,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은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지정학적 위기와 각국의 고강도 긴축이 앞으로 수년간 이어지며, 물가는 안정적으로 상승하고 경제는 끝없이 우상향할 것이라는 그동안의 통념이 철퇴를 맞는 것은 아닐까?

현재 상황이 일시적인지, 혹은 아예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것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현재 세계는 지난 수십 년간을 풍미했던 하나의 패러다임이 저물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출발점을 이제 막 통과한 셈일 것이다.

저작권자 © 업다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 2024 업다운뉴스.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