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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알못의 서울 나들이] 한성백제박물관 (下)

  • Editor. 여지훈 기자
  • 입력 2022.09.2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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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내 전시 공간은 크게 1층과 지하 1층, 2개 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2개 층에 걸쳐 전시된 풍납토성 성벽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는 안내원으로 보이는 이가 서넛의 관람객을 상대로 백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기자는 구석기와 신석기 등 문명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지하 1층 전시관을 빠르게 훑은 뒤, 백제의 건국부터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 중국과 일본 등 백제가 해외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시기의 유물을 전시한 1층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사진=여지훈 기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 [사진=여지훈 기자]

본래 백제란 이름은 ‘많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 또는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는 백성락종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백제의 다른 이름으로는 ‘십제’(삼국사기), ‘백제국’(삼국지), ‘위례국’(일본서기)이 있고, 이외에도 매를 뜻하는 ‘응준’, 신라와 다투었다는 뜻의 ‘나투’란 명칭도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주몽의 또 다른 아들 유리가 고구려의 왕위를 잇자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하하던 중 기원전 18년 한강 남쪽에 터를 잡고 백제를 건국했는데, 학계에서는 온조 일행이 북방의 유목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를 모두 경험한 덕분에 기존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마한 50여개국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들 소국을 통합해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전체 역사 중 가장 오랜 기간을 차지하는 한성백제는 백제 최대의 전성기였다. 그 유명한 근초고왕도 바로 이때의 인물이다. 이 시기에 백제는 마한세력을 통합하고, 왕도 한성을 중심으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후 한강 유역을 상실한 뒤에도 이러한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백제는 왕도 한성을 중심으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후 한강 유역을 상실한 뒤에도 이러한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사진은 '양직공도'에 묘사된 백제 사신의 모습. [사진=여지훈 기자]
백제는 왕도 한성을 중심으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후 한강 유역을 상실한 뒤에도 이러한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사진은 '양직공도'에 묘사된 백제 사신의 모습. [사진=여지훈 기자]

백제와 중국은 3세기 말부터 교류가 빈번했고,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비단, 차 등을 들여왔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 청자, 초두, 허리띠 장식 등이 이를 방증하는 유물이다. 또 양나라 원제 소역이 왕자 시절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그림 속 백제 사신은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고 있다. 백제는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초기에는 육지 가까이 운항하는 연안항로를 이용하다가, 후기에는 서해 횡단항로를 개척해 훨씬 단기간에 중국을 오가며 교류했다.

백제는 일본(왜)과는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근초고왕 때 제철기술과 상감기술이 집약된 칠지도를 왜왕에게 선물하고, 아직기, 왕인 등을 보내 학문과 기술을 전파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에는 5세기 왜 왕실이 백제로부터 직조기술자들을 초청한 기사가 수차례 등장하며, 6세기에는 백제 성왕이 왜에 불상, 경전을 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로도 백제에서 의학박사, 승려, 사찰 건축가, 불탑건축 박사, 기와 박사, 화가 등이 건너갔다. 이후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인 상당수가 왜로 망명했고, 당시 백제와 군사동맹체였던 왜는 선진기술을 지닌 이들의 이주를 적극 수용했다. 이러한 백제문화의 수용은 이후 7세기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인 아스카문화 형성에 큰 토대가 됐다.

한성백제박물관을 관람 중인 학생들 [사진=여지훈 기자]
한성백제박물관을 관람 중인 학생들 [사진=여지훈 기자]

넓은 박물관을 오가며 백제 역사와 문화 전반을 돌아본 시간은 1시간 반 남짓. 그동안 기자가 마주한 관람객이라곤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기자 개인적으론 설명에만 집중할 시간을 가져 매우 만족스러웠으나, 박물관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넘치는 인파를 감안한다면 박물관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잔디밭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왕왕 눈에 띄었다. 절로 마음이 흡족해지는 평화롭고 생기로운 광경이었다. 좀 더 산책을 이어갈까도 했으나, 사람들이 많이 불어난 탓에 나무 그늘로 들어가 눈앞의 호수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호수는 사실 몽촌해자로, 적이 몽촌토성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벽을 따라 파놓은 군사 방어시설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고즈넉한 풍광을 지닌 호수이자 자연생태 교육공원으로 활용될 뿐이었다.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잔디밭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여지훈 기자]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잔디밭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여지훈 기자]

한동안 우두커니 바람을 쐬다가 느릿한 걸음으로 공원 밖으로 나왔다. 웅장하게 선 ‘세계평화의 문’을 지날 때는 정중앙에서 타오르는 성화를 볼 수 있었다. 문을 나서자 좌우로 늘어선 수십 개의 탈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기자의 가는 길을 배웅해줬다.

지하철역을 향해 뻗은 도로변에는 이달 30일부터 내달 2일까지 ‘한성백제문화제’가 개최됨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한성백제 시기부터 88서울올림픽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송파구의 문화유산을 토대로 구현한 축제라는데, 여유가 된다면 또 한 번 와도 좋을 듯싶었다.

지하철에 몸을 싣자 이른 아침부터 나선 탓에 미뤄뒀던 졸음이 일시에 쏟아졌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꾸벅거리는 고개를 애써 가누며 알뜰히 챙겨온 팸플릿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먹었다. 설알못 기자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두 번째 나들이가 기분 좋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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